앞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제시해왔다. 1, 2, 3주차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이제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이 글이 단순한 연애 매뉴얼 같은 거라든가, 사랑에 대한 how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사랑에 대한 what?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조차 잘 모르기에 우리 머릿속에서만이 아닌 알랭 바디우 등의 사랑과 밀접한 철학자들도 인용하면서 글을 전개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사랑이란게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만을 주안점으로 다뤄야 하는지, 부모, 자기애 등 다양한 범위를 넣어야 하는 지도 애매하다. 아마 사랑에 대해서 남녀 간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사랑이 실체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관계이기 때문이지, 다른 관계들이 ‘사랑’이 아니라고 섣불리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 행위를 넘어서 진리를 찾기 위한 전초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philosophia도 ‘지혜를 사랑하는 것’아닌가?

앞으로 남은 칼럼에서는 오늘날에 보편적으로 사랑의 완전체라고 인식되는 ‘결혼 제도’를 좀 더 깊게 생각해본다던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사랑을 제시해 보기도 할 것이다. 가령 정말 ‘결혼’이란 것이 우리가 사랑과 관련해서 이토록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개념일까? 엥겔스처럼 사회 제도로서 ‘결혼’을 부정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고, 반면에 사회 제도와 결부한 사랑의 가장 합리적인 형태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다뤄야 할 것은 결혼이 정말 ‘사랑’과 얼마만큼이나 연관이 있을까하는 의문이다. 동거는 결혼을 대체할 수 없을까? 폴리아모리 등의 새로운 사랑의 형태를 현실에서 구현시키면 정말 사회가 아노미적인 상황이 될까? 나아가 우리는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을까?

과거보다 좀 더 복잡해진 오늘날 사랑도 좀 더 복잡해졌고, 앞으로 더 복잡해 질 것이다. 100년 후 결혼은 보편적인 사랑에 대한 사회 보장제도가 아닐 수도 있고, 동거가 당연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이 글을 보고 있는 개인들 즉 ‘나’에게 중요한 건 여기서 제시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에게 맞는 사랑을 찾고, 나와는 다른 사랑도 인정하는 것일 게다. 사랑은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 방식에 있어선 우리 모두가 다를 수 있고, 그건 동등한 위치에서 생각해 줘야 한다. 사회적인 제도로서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어도, 어떤 게 더 ‘사랑’하는 것인지에 대한 정도의 차이를 우리로선 매길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글을 진행해왔고, 앞으로의 글도 그럴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도 그런 생각을 기반으로 글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칼럼을 통해‘사랑’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유연해졌다면 우리로선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전반전을 마치고 사랑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생각이 제시될 후반전으로 넘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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