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인지 올해 건대신문 문화상 시부문에 응모한 작품 대부분은 ‘고립’과 ‘쓸쓸함’, ‘망설임’에 집중되고 있다. 팬데믹이 지나고 사회가 빗장을 푼 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불안 때문이며 갈수록 분명해지는 자본주의 물신의 비인간적인 폭력과 위악(僞惡)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3년을 단절 속에서 살아온 만큼이나 이 사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열망은 자못 크다. 필자에게 건너온 작품들은 모두 이러한 사태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또한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웠다. 아울러 ‘고립’이 초래한 자기
텅 빈 거리에 여자아이가 홀로 서 있다. 이미 떠나보낸 그 아이가 길을 잃은 듯 다시 내 눈앞에 서 있다. 맞아 나는 너의 이름을 알고 있지나는 다시금 아이에게 길을 제시해야만 한다. 작년의 내가 가르쳐준 지름길에서 아이는 다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어쩔 줄 모르는 발걸음으로 줄곧 이곳에서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더 어른스러운 길을 알려주고 싶다.아이 앞에 놓인 수많은 갈래들을 살피다 지름길 앞에서 말없이 고개를 멈춘다. 그래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지그녀는 떠밀리듯 그 길에 오른다. 나는 내년 이맘때쯤 그녀
흔적 너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니 내 시간은 시계와 같아 숨막히게 정교한 태엽부품 하나하나가 작은 톱니바퀴들을 맞물리며 거대한 시침을 돌게 해그 거대한 금속 틈 사이로 분홍빛 설렘을 풍기고 나는 그 향기의 째깍임에 맞춰 눈꺼풀을 깜빡이지내 지구는 네 설렘의 시침을 축으로 돌아 그래서 나는 매일 펜을 들어 그 역사를 기록해그건 일종의 사명감이지그 아름다움이 종이에 기록되어 유물이 되고 언젠가 역사의 일부가 되어 미래를 정의할 수 있도록 하지만 동시에 그건 오만함이지아름다운 것들은 기록되지 못해불빛과 꽃향기와 밤과 만년필의 사각거림은 아
얼마 전에 만난 고등학교 때 친구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습니다. 자신은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또한 지나가리라는 걸 알기에 크게 기뻐할 일도, 슬퍼하거나 놀랄 일도 없다고 말한 친구는, 자기 삶이 남의 것보다 특별할 거라고 기대할 이유가 어디 있겠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유독 기억에 남았습니다. 글쎄요, 저는 아직까지도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이끈 저의 힘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질투라기보다는 이다지도 저를 못 살게 구는 세상에게 복수하고 싶은 억하심정에 차라리 더 가까운 것이었습니
올해 건대신문상 시부문에는 총 52편이 응모되었다. 작년에 비해 다소 줄어든 수치지만, 작품의 밀도는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무거웠다. 무엇보다 대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정밀하고도 섬세한 ‘응시’와 뛰어난 언어 감각, 이미지의 독특한 운용은 이번 작품들이 도달한 평균적 성취다. 아울러 가벼운 스케치에 그치거나 자의식의 낭만적 과잉으로 점철된 작품보다는 뚜렷한 주제의식과 정확한 문장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산출한 작품이 많았다는 것도 특징이다. 여기에 더해 ‘비(非)-주체화’되어버린 현대사회를 적극 반성하고 이를 투사한 작품도 있
그대는 시를 태운다밑도 끝도 없는 말들의 밀실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상강 지나서 나무들 머릿결만큼 불그레한 뺨으로, 더는 부끄럽지 않게나무에 의탁하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지전처럼 태운다마치 어릴 때 무서워하던 서당골 무당 할멈그 허리가 땅에 내리도록 굽은 할멈이 맨손으로 불에 마른 작약 덩굴 밥을 먹이듯이 그대는 비슷한 일을 한 차례 지나왔다가을과 겨울 사이가 시작되는 날, 신들린 듯눈 뜨자마자 온 집안을 뒤엎으며 과거를 찾았다사과 상자와 포장지 사이로 나부라지는 상과대 졸업장과 학사모, 연애편지와 타자기 잉크자국, 자취방에서부터 모
올해 건대신문상 시부문에는 총 74편의 시가 응모되었다. 나는 74편의 문장들을 천천히 읽으면서 학생들이 되돌아본 시간의 아득함과 쓰라림을 가늠했다. 비대면 방식의 삶이 초래한 쓸쓸함이 무척 강하게 나타나 있는 시들이 많았다. 타자에 다가가는 색다른 방식이 돋보인 작품들은 물론 비록 자의식의 과잉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내면에 투영된 타자들을 충실히 읽어내려는 작품도 적지 않았다. 장시화, 산문화 경향도 특징이다. 숙고한 결과 10개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기준은 내면에 녹아든 타자를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얼마만큼 핍진하고 현실
오랜만입니다. 전에는 멋모르고 마음 내킬 때 불쑥 찾아가곤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실례일까봐 마음이 쓰입니다. 그래도 잘 지내시냐고 다시 여쭙고 싶습니다. 요즘 가능한 거짓말을 안 하는 걸 연습하는 중입니다. 거짓말을 안 한다고 누가 칭찬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고 느낍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를 위해서이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도 오랫동안 입고 다녀서 벗으려니 살갗에서 쩍쩍 소리가 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른 계절을 준비해야 하고, 햇볕 아래에서 열심히 산책을 다녀보렵니다.한동안
남이섬에서 바람은 멎지 않았다강물은 어제 하루만큼 더 깊었고전쟁처럼 널브러진 가로수 잎잎 사이로그는 그 넓은 가게를 홀로 지키고 있었다밝은 적색의 스웨터는 칠흑 같은 그의 살결과 눈동자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이제 더는 말할 것이 없었다 흑단 티크 주목 상아를 껴입은사바나의 온갖 들짐승들이난로 하나를 둘러서서 또 한 가을조용하게 늙어가고 있었다 그들 중 아무도 몸짓하지 않았다고국은 때로 빛바랜 꿈으로 어른거리며한 무리 누 떼처럼 스쳐지나가고바람은 포화처럼 잎잎 사이로 울었다이제 더는 홀로일 것도 없다남은 일은 그저점점 더 단단히 굳어
올해 건대신문상 시부문에는 총 112편의 시가 응모되었다. 작년에 비해 두 배 가까운 편수다. 기성 시인 못지않은 치열한 자기-반성의 시로부터 미흡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 회복이라는 유의미한 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코로나19 사태’라는 세계적 위기가 은연중에 반영된 작품들도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모두 ‘시가 현실의 핍진한 언어’라는, 시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통찰에 충실한 것이다. 시가 언어의 내적 고립에만 치중하는 요즘과는 사뭇 달라, 무척 고무적이다. 투고 작품들을 숙고한 결과 8개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안녕하세요. 아주 오래된 편지를 부치는 마음으로 소감문을 씁니다. 여러분에게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랍니다.나는 아침 해가 기꺼웠던 기억이 없습니다. 내가 앉은 자리는 어두운데 날은 너무 좋아 그늘 밑에서 울었던 기억이 여전히 서늘합니다. 언젠가 그리운 사람의 얼굴에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나는 그 장면에 이르러서는 몹시 슬퍼졌습니다. 옛날에, 나는 그가 햇빛에 울지 않도록 눈을 가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는 이런 마음으로 썼습니다. 우리는 평생 서로가 타인이지만, 그래도 각자의 당신에게 손
길을 잃어버린 이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지나간 시간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는 법이다 주머니에 난 작은 구멍에선 어느 바닷가의 흰 모래가 흐르고, 더운 여름 풀더미를 분주히 기어 다닌 달팽이의 진득한 흔적처럼 남는다 언젠가는 돌아가야만 한다는 듯 구태여 자취를 남기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너는 한 움큼을 끊어내어,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듯. 묻고 싶다. 너는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어째서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영문도 모른 채 멈춰 선 건지 마냥 황홀하던 것들을 전부 보내주어도 무거워진 사람은 어디에 수납되어야 마땅한가 뿌옇게 부풀어 오른
요즘엔 힘들다는 사람이 참 많다.나도 그렇다. 힘들다. 그래서 눈물이 나기도 한다.나는 힘들어하는 나 자신과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싶었다.아주 오랫동안 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아오다보니 느낀 것은 언제까지나 힘든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괴로운 일만 이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단연코 모든 사건사연들은 그 끝이 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는 끝날 그 사건자체가 아니라 어려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고통이 언젠가는 반드시 끝날 거라는 것과 희망과 기쁜 날도 반
울음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순간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눈물은 너무도 무거워 참을 수 없다는 것과눈물의 무게는 마음의 무게와 같다는 것을.눈물을 훔쳐내느라 애쓰고 나면단단해진 마음은 한층 더 깊은 바다 속처럼 흔들림이 없다. 눈물의 색깔은 까맣고 짙은 회색들 사이 어디쯤일 것 같다.형형색색의 마음들 다 잊게 해주고 세상의 모습위로 다 덧칠하듯 엉겨서내면의 나와 오롯이 마주하게 만든다. 눈물의 온도는 엄마 손의 온도와 같다.그 온도를 느끼고 있으면 더 눈물이 나는 그런 온도. 가을 갈대 끝에 걸린 바람은 내 마음도 어루만지다가내 눈물
시는 언어의 예술적 울림이기 이전에 삶의 진솔한 이야기이고, 생활의 끊임없는 반성이자 자기-성찰과 사랑이다. 다시 말해, 시는 언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우리 사소한 일상에서 건져 올리는 하찮고 비리며 하염없는 그리움의 시간들에서 산출되는 것이다.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것은 시에 대한 최종 판단에 불과하다. 그 어떤 시도 결코 삶을 비껴가지 않는다. 올해 건대신문상 시부문에는 총 73편의 시가 응모되었다. 투고 작품들을 숙고한 결과 6개의 시편들을 최종심에 올렸다. 기준은 두 가지였다. 언어의 과잉이 없어야 할 것, 그리고 삶을
반쪽의 증명방법이 상을 받았습니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6년을 써왔기 때문일까요. 사실 시는 상을 받은 텍스트가 아니라 지금 쓰고 있는 이 소감문입니다. 그렇게 믿기로 했습니다.2013년이 시작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거든요. 자살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가 그렇게 시를 좋아했었나, 하는 의문도 듭니다. 그러나 좋아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으면서 시를 씁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모든 텍스트들은 시가 아니거든요. 시를 쓴다고 하면서 시를 하나도 모릅니다. 국어국문학과를 다니면서도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그
너는 등이 있는 생물이야라고 네가 말하면등이 생겼다 몸이 따뜻하다고 말하면 여름이었다 등이 생기고 나서 눕는 게 불편해진다어떻게 이불을 덮어도 무방비였다팔이 차츰 등에 포함되기 시작하면나는 등이 있는 생물서로의 척추가 가지런하다불편하게 누운 몸이 따뜻해서욕창이 생긴다등에서부터 등이 끝나면 어깨가 될 수 있니등을 구부리고날개뼈가 튀어나온다날 수도 없는 것인데도등이 있고 날개뼈가 있고손이 닿을 수 없는 몸이 있다욕창이 태어나는 곳에서어깨의 뒤쪽까지모두 등이 되었다 등이 없는 생물의생장점을 자극해서등을 태어나게 해야지기대는 곳 눕는 장소
투고작들 중 「반쪽의 증명방법」 「바이르테」 「비둘기가 자살했다」 「사랑의 종교학」 「구름이 있는 저녁」 「진안」 「날」 「표선」 등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이 여덟 명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면서 일정한 수준 이상의 시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반쪽의 증명방법」과 「바이르테」는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고, 당선작 한 편만을 선정해야 하는 심사자로서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바이르테」는 간결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사랑을 둘러싼 미묘한 지점들을 짚어낸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일교차로 신기루가 될까”라는 문장처럼 서로
투고된 시들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 중 하나일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 감정을 토로하면서 막연하고 상투적인 한계에 갇혀 있는 작품들과, 구체적 현실감이나 나름의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지만 표현이 너무 거칠고 직설적인 작품들. 그 중에서도 내용과 형식이 어느 정도 균형감을 갖추고 있고 개성적인 목소리를 지닌 작품들은 등이었다. 이 시들은 제목부터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독특한 발상과 표현을 짐작케 한다. 이 다섯 사람은 약간의 편차는 있었지
가랑눈 너의 온도로 눈이 내렸다피부에 서성거리는 내 열을 밀어냈다 늙은 골목길폭우처럼 멈춘 시간 텁텁한 가로등 불빛내 발을 본다발과 바닥의 위치가 자꾸만 뒤바뀌고나는 아예 눈이 되려는데 다신 울지 않으려고네 앞에서 너를 묘사할 수 없다하더라도눈이 내린다두 눈을 감으면 온몸이 행복해져 울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하얘지는 걸까 영영 사라져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눈이 불빛을 침범하고 구름이 되고 싶다 했잖아구름 물방울 양털 바람 누군가가 닿는 소리 포개져도 아프지 않은 것들 바닥에 스며든 눈처럼구름처럼 아프고 싶어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