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시를 태운다

밑도 끝도 없는 말들의 밀실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상강 지나서 나무들 머릿결만큼 불그레한 뺨으로, 더는 부끄럽지 않게

나무에 의탁하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지전처럼 태운다

마치 어릴 때 무서워하던 서당골 무당 할멈

그 허리가 땅에 내리도록 굽은 할멈이 맨손으로 불에 마른 작약 덩굴 밥을 먹이듯이

 

그대는 비슷한 일을 한 차례 지나왔다

가을과 겨울 사이가 시작되는 날, 신들린 듯

눈 뜨자마자 온 집안을 뒤엎으며 과거를 찾았다

사과 상자와 포장지 사이로 나부라지는 상과대 졸업장과 학사모, 연애편지와 타자기 잉크자국, 자취방에서부터 모아두던 잡지들

모두 조금씩은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나는 그 과정을 눈에 주워담고 있었다

이것이 그대가 겨울옷을 맞춰입는 방식이리라

그러니 이제 다 되었다

 

오늘 그대가 꺼내온 시집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마주한다

가마솥도 아궁이도 배가 고파 펄펄 울고있고

시집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민음사 초판본 전원시편이 들어가고

해금되자마자 산 백록담과 오랑캐꽃도 들어간다

아쉽지 말라고 누운 풀도 먹여준다

그 여자네 집도, 사슴도, 그림 속 까마귀도 벌건 눈시울을 감추고

가야할 때를 알고 말을 아끼는 말들이 분분히 흩어지는 뒷모습

진즉 끝난 잔치 뒤로 또다른 잔치가 넘실댄다

 

시집 담아온 박스에 버무린 배추가 담기고

가마솥에 끓는 물은 고기 삶을 물, 믹스커피 얹을 물, 목욕 때 찌끌여 때를 뺄 물로 거듭난다

나는 쭈그려앉아 한때 소중했던 시집을 불사르는 그대 뒷모습을 보면서

올해는 배추가 안 되어서 김장거리가 너무나 줄었다는

밭둑에서 울리는 듯한 그대 목소리에 기대다가

문득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오늘밤 우리는 참으로 곤히 잘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다 된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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