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에게 정년을 보장한 이유는 역사적으로 명쾌하다. 권력과 기득권을 비판하는 자유를 주기 위해서다. 진실을 바탕으로 한 학자의 비판을 가로막기보다 보장할 때 사회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성찰과 인식이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도입된 제도가 ‘교수 정년’이다.

물론, 한국은 유럽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 딱히 군부독재 시대에 해직된 교수들의 사례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민주화되었다는 지금도 정년을 보장받지 못한 학문후속세대들이 ‘시간강사’라는 이름으로 저임의 굴레에 허덕이고 있다. 그들이 기득권을 비판하는 글과 말을 공개적으로 해나가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나라가 제 길을 걸어가지 못할 때 지식인의 역할은 막중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지식인 집단이 학계와 언론계다. 지식인들이 침묵하거나 비판에 소홀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는 우리 역사가 생생하게 증언해준다. 교수와 언론인을 대량해직하거나 ‘블랙리스트’ 따위를 만들어 관리하는 권력의 끝은 언제나 불행했다. 적실한 때에 감시와 비판을 받지 못하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릇 지식인의 현실 참여에는 두 갈래가 있다. 기득권에 들어가는 참여와 기득권을 비판하는 참여가 그것이다. 민주화된 나라에서 권력에 참여하는 일을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식인의 자리에 적합한 것은 비판적 참여다. 언론계나 학계 출신으로 권력에 들어가는 사람은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숱하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학계와 언론계가 조금 다른 듯하다. 적어도 언론계에선 권력에 들어가는 언론인을 비판적으로 보는 전통이 아직은 강하다. 딱히 그 ‘전통’ 때문은 아니지만 내가 세 차례 ‘자리’ 타진을 받았음에도 그때마다 망설임 없었던 까닭은 중뿔나서가 아니다. 오롯이 기득권을 감시하는 글을 쓰고 강연장에서 젊은 세대와 만나는 자리가 지식인으로서 더 적실하고 중요하다고 판단해서다.

정작 뒤늦게 몸담은 학계의 대체적 분위기는 사뭇 다른 듯하다. 기득권에 친화적일 때 자유로워 보인다. 권력을 비판하는 참여보다 권력에 들어가는 참여를 더 높이 평가하는 ‘문화’마저 감지될 때는 씁쓸함마저 느낀다.

명확한 근거를 갖고 잘못된 ‘권력 현상’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일이 학계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보수와 진보의 시각차 이전에 민주주의 근간의 문제이기에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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