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남 사학과 강사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의리에 맞고 많은 사람의 정서에 화합하면 반드시 천심과 합치할 것이다.” -회재 이언적의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 중-

지난해 우리는 광장에 모여 잘못된 국정을 바로 잡으라고 목청껏 외쳤다. 그 결과 ‘이러려고 내가 투표했나’ 싶은 자괴감이 들도록 만든 그 누군가를 촛불에 실어 날려 보내고,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하였다. 이제 우리는 다시 정의와 원칙이 무엇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지 새삼 되돌아보아야 한다.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서슬퍼런 절대 권력이 백성을 짓누르는 엄혹한 세월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임금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한 선비가 있었다. 바로 조선 중종 때 문신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다.

이언적은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후 1530년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또 다시 관직을 제수받고 조정에 나아갔는데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언적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사람답다고 할 때의 ‘사람다움’은 매우 추상적이면서 보편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 개개인 너머에 있는 초월개념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다움’은 옳은 일을 위해 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행동은 부모답기도 했고, 자식답기도 했고, 군인답기도 했고, 선생답기도 했고, 학자답기도 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 ‘~다운’ 행동들을 묶어 우리는 ‘사람답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언적은 내면의 수양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바로잡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사람답다’는 것이 머리에 들어있는 이상이나 박물관에 전시된 표본 같은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경험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특히 「일강십목소」에서는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을 근본강령으로 규정하고, 하늘[天道·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다시는 반칙이 판치는 세상,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권력자,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세력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한다. 회재 이언적의 생각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회재의 아래 시 한편은 현재 우리의 심정이 아닐까?

江沈山影魚驚遁/ 강에 산 그림자 깊으니 고기 놀라서 숨고

峯帶煙光鶴危悽/ 산에 부연 기운 가득하니 학도 두려워하네

物寒固宜述幻忘/ 만물이 막히어 모두 허황으로 미혹되니

人通何事誤東西/ 사람들은 어찌 동서도 분별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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