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민 문과대·미커17

‘주체적 섹시’, ‘주체적 아름다움.’

페미니즘이 대두되기 시작한 이후 언제부터인가, 일반적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쓰이던 수식어 앞에 ‘주체적’이라는 말이 붙기 시작했다. 섹시함과 주체성, 아름다움과 주체성. 어휘를 동일 맥락에 따라 변형해보자면 자주적인 코르셋으로의 해석이 가능하다. 사회 속에 만연화 되어있는 여성 혐오적 코르셋, 즉 자기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와도 같은 코르셋을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한다라는 말이 모순적이지 않다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전 팔루디의 도서 ‘백래시’에서는, 여성의 권리 신장을 저지하려는 반동의 메커니즘에 ‘백래시(backlash, 반격)’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정치, 사회, 문화적 역풍을 해석하고 그에 맞서려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분석의 도구를 제공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페미니즘의 퇴보, 백래시의 단계에 진입 중이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었다. 그런데 그들의 페미니즘 역시 백래시로 인해서 퇴보의 절차를 밟고 있다. 가령, 미국의 여아들을 상대로 한 장난감 인형, 바비 인형은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슬로건으로 광고를 기재했으나, 바비인형의 외적인 모형은 상당한 코르셋을 착용하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장난감임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화장과, 기형적으로 잘록한 허리를 가지고 있는 바비 인형. 그리고 이러한 바비 인형은 어느 순간 ‘美’의 상징으로서 관습화되기 시작하였다. 어른들은 물론 어린이들에게도 보편적인 미의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이에 부합해야지만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백래시가 발생했다. 그들은 ‘주체적 로리’를 통해, 어린아이와도 같은 형상으로 섹스 어필을 하는 본인들의 모습이 주체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모두가 그들의 아름다울 권리를 추구하기 위한 행보라고 보기보다는, 여전히 코르셋을 벗지 못한 채로 남들이 허락하는, 남자들에게 인정받는 페미니즘을 하고자 하는 모습인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역시나 백래시의 진행 과정에 있다. 최근 L사의 화장품 광고에서는 페미니스트 연예인을 모델로 사용하여, ‘당당한 여성의 당당한 화장’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사례가 있다. 사실 화장이라는 꾸밈노동 자체가 일종의 코르셋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코르셋을 착용한 여성만이 진정한 여성’이라는 또 다른 코르셋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주체적이라는 단어의 위험성을 깨닫고, 과연 우리가 무엇을 위해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코르셋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보고 공부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의 ‘주체적 美’는 없어야 할 것이다. 모순적인 단어들의 조합을 아무런 경각심 없이 수용하는 태도도 이제는 잠재워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