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철학과 교수
김석 철학과 교수

 

미하엘 엔데가 지은 소설 모모는 시간을 훔친 도둑들과 이에 맞서 시간을 다시 찾아주는 한 기묘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평화롭던 마을에 어느 날 시간은행 사람들이 나타나 사람들이 시간을 얼마나 낭비하고 사는지 설명하면서 시간을 아껴 저축하라고 설득한다. 이들은 시간을 아껴 무언가 끝없이 성취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사람들을 꾀인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바빠지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만남도 피하고, 각박하게 살면서 평화롭게 누리던 일상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모모는 시간을 나누어주는 호라 박사를 만나 시간의 거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친구들과 연대해 회색 시간 도둑을 물리치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는 이야기다.

동화에 나오는 시간을 도둑맞은 마을 사람들 이야기는 현대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도시인들 모습에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부지불식간 도둑맞은 것은 잠시 시간을 멈추는 한가로움과 모든 것을 새롭게 리셋 하는 여백일 것이다. 일터로, 학교로 가는 전철에서도 쉬지 않고,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무언가를 듣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계속 무언가를 찾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근대 이후 사회적 요구와 목소리를 내면화한 산업사회에서 점점 신자유주의 경쟁과 성과 이데올로기가 일반화되면서 각자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크건 작건 개인은 끝없이 어떤 목표를 향해 노력하면서 잠시의 한가로움도 박탈한 채 시간을 아끼려고 강박적으로 발버둥 친.

전근대 사회에서 권력이 생산과 노동을 강제했다면 신자유주의 통치방식은 철학자 푸코가 말한 것처럼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는 성과적 주체를 양산하면서 일상에 침투한다.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나 줌 수업, 온라인 회의가 일상화되면서 부수적으로 필요했던 시간이 많이 줄었지만 그렇다고 시간 여유가 더 생긴 것도 아닌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얼마 전 혼자 늦은 점심을 하고 어학원 근처 숲길을 통해 연구실로 돌아오다 문득 주변에 핀 많은 들꽃과 작은 잎새들, 간밤에 내린 비로 젖은 돌과 이끼들, 살랑거리는 나뭇잎의 촉감과 대지의 냄새에 취해본 적 있다. 수천 번도 더 무심하게 지나다니던 길인데 그날은 처음으로 길의 풍경이 나를 사로잡아 한 시간 가까이 그곳에 머물러 사색에 잠겼다. 덕분에 주위를 느끼고 생기를 얻고 영혼이 치유 받는 행복을 느꼈다. ‘이게 바로 존재가 서로 연결되었다는 안도, 포근함, 평화가 아닐까생각하며 다시 이런 시간을 갖자고 다짐하면서 숲을 나왔다.

영혼의 치유와 행복은 사실 거창하지 않다. 숨 가쁜 일상의 쳇바퀴를 잠시 멈추고, 그간 보지 못한 나 자신과 주변에 눈길을 주며, 작은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치유다. 최신 신경생리학 연구에 따르면 하루에 15분 정도 아무 것도 안하는 멍 때리기를 하면 창의력이 고양되고, 정신건강에 좋다고 한다. 잠시 멈춘 순간과 한가로움에 일상의 고즈넉함이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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