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가 인기다. ‘장 교주’라 부르면서 열광하는 이들도 있고, ‘장기하 현상’이라며 새로운 청년문화의 구심이라는 칭송도 있다. 그러나 나는 장기하가 20대의 상징이라고 하기엔, “뭔가 너무 낮게, 머리카락에 거의 닿게, 조금만 뛰어도 정수리를 쿵하고 찧을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장기하 노래의 시적 화자는 이렇게 산다. 점심쯤 일어나 양말을 빨아 널고 창가에서 차를 마신다. 그 차는 싸구려 커피이다. 미지근한 커피에 속이 쓰리다. 순간, 그의 무심한 시선에 들어온 바퀴벌레. 너무 많이 보아 아무렇지도 않다. 비닐 장판이 하 눅눅해 움직일 때마다 발바닥에 쩍 달라붙는다. 그러다 배가 고파 시장을 보러 나선다. 혼자 먹을 식탁을 차릴 때에 문득 이상하단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 여느 날처럼 그에겐 약속은 하나도 없지만 그는 별 일 없이 재미있게 산다 여긴다. 하지만 자리에 누워 뭔가 이상하단 생각에 두 눈을 말똥거린다.

장기하 노래의 이미지와 감성을 해석하는 문화적 코드를 ‘패배자 코드’라 부른다. 청년 백수의 ‘찌질한’ 일상을 그려낸 가사, 그런 삶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는 심심한 창법, 세련된 음악에 길들여진 귀를 ‘오그라들게 하는’ 반주는 정말 ‘대책 없는 가운데 솔직하며 자조적인, 웃기는 백수로고’라 여기게 한다. 이런 장기하 노래가 다양한 장르의 대중음악 중 하나라면 괜찮다. 그러나 그가 패배자 코드로 읽히는, 그리하여 이십대가 그로써 자기정체성을 삼는 동시에 기성세대가 이십대를 ‘그저 그런 놈들이군’이라고 파악할 수 있는 상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월의 나무처럼 ‘푸른 나이’엔 그렇게 살 수 없다. 깊은 절망 속에서 “나 어떡해!” 호소하고, 동해바다로 고래 잡으러 무작정 떠나야 한다. 불놀이도 하고 말도 달려야 한다. 시인 최두석이 얘기하듯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노래는 실현가능성을 분석하는 사유의 우회 없이 바로 심장을 찌르는 것이다. 그렇게 노래는 현실 세계의 질서와 논리를 초월하는 상징을 만들어왔으며, 그런 상징들은 수많은 사연들을 아우르고 그 맺힌 것을 터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하의 노래엔 88만원 세대에게 필요한, ‘강철 무지개’ 같은 초월적 상상력이나 의지적 낙관, 심장을 뛰게 하는 말들이 없다.

가사를 이렇게 바꿔 보면 어떨까? <느리게 걷자>에서 ‘나’는 채찍을 든 도깨비 같은 시뻘건 아저씨가 눈을 부라려도 뭐라 하지 않으며 그저 그가 혼낼 때 잠시 앉았다 간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느리게 가도 그 아저씨가 가라는 길을 걸을 뿐이다. “다른 길로 걸어라.” <달이 차오른다, 가자>에는 말을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을 것 같아 지레 겁먹고 벙어리가 된 소년이 나온다. 그 소년은 창밖의 달을 보면서 ‘그냥 잠들어 버려서 못 갈지도 몰라.’라고 주저한다. “소년이여, 가서 늑대인간이라도 되어라.” <싸구려 커피>의 몇 년 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처럼 썩어가지고는 조금만 뛰어도 정수리에 닿을 만한 그런 ‘하늘’이라면, 한번 들이박아 볼 만하지 않겠나?

또한 나의 충고도 ‘분장실 강 선생’이 손톱 손질하면서 날리는 “니들이 수고가 마안타아” 정도로 받아들이며 웃어넘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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