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말 중에서 ‘호모 로쿠엔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간다. 단언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소통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소통을 거부할 방법이 있는가 자문해 보자. 직관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떠나 버리는 것이다. 혼자 사는 세상에서는 타자와의 소통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무인도에 내던져지더라도 자기 내면과의 소통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러한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될 때 자기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하게 된다. 어이없는 실수를 했을 때 스스로를 질책하는 것도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라 할 수 있다.

조금 더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세상과 인연의 끈을 끊어 버리면 소통의 통로도 막혀 버린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죽음으로도 인간의 소통을 막을 수는 없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찾아 애도의 뜻을 표하는 국민들을 생각해 보자. 이들은 서민의 소통 방식을 지향했던 대통령과 영혼의 대화를 나누려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전통 제례는 사자와의 지속적인 소통을 유지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소통을 막는 것은 인간의 필연적 존재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소통 거부의 상징적 움직임을 볼 수 있어 안타깝다. 1년 전 이맘때 우리는 명박산성이라는 흉물스러운 컨테이너 박스 더미를 시내 한 복판에서 볼 수 있었다. 며칠 전에는 서울 광장을 에워싼 전경 차량의 행렬을 다시 지켜봐야만 했다. 벽은 소통 거부의 가장 극단적인 상징물이다. 

소통 채널의 차단을 위해 사용된 컨테이너 박스는 단순히 큰 물건을 운반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수출로 오늘에 이른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는 성공의 신화를 보여주는 지시물이다.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우리에게 원은 충만함의 의미다. 서울 광장을 에워싼 전경차량이 만든 원의 모습은 우리에게 충만함의 만족스러움을 주는가? 이러한 벽이 소통을 막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소중한 정서마저 변질시키고 있어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서 소통의 방식이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 매체의 발달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유로운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소통의 국경이 사라져 이렇게 열려가고 있는 세상에서 소통의 필요성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소통에 임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해 보인다. 죽은 사람과 소통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리적인 벽은 장애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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