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백두산 곳곳의 역사를 돌아보다!

<건대신문> 1224호에서는 총학생회가 주관한 ‘북경-백두산 역사 기행’ 4박 5일간의 일정을 동행해 그 모습들을 담아봤다. 역사기행 기간 동안 본 명소와 유적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기행을 함께하지 못한 많은 학우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건대신문> 1224호에서는 총학생회가 주관한 ‘북경-백두산 역사 기행’ 4박 5일간의 일정을 동행해 그 모습들을 담아봤다. 역사기행 기간 동안 본 명소와 유적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기행을 함께하지 못한 많은 학우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건대신문> 1224호에서는 총학생회가 주관한 ‘북경-백두산 역사 기행’ 4박 5일간의 일정을 동행해 그 모습들을 담아봤다. 역사기행 기간 동안 본 명소와 유적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기행을 함께하지 못한 많은 학우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8월 24일 첫째 날
기행 첫 날의 일정은 한국을 떠나 백두산 근처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학생회관 앞에서 고사를 지낸 뒤 이른 11시에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의 수속 절차를 마친 뒤,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늦은 1시 중국 장춘공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장춘공항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다시 관광버스로 갈아탄 뒤 7시간을 달려 깊은 밤이 되어서야 숙소인 동북호림대하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8월 25일 둘째 날
이른 8시에 버스를 타고 백두산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순조로울 것 같았던 백두산 등정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산 입구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도중 앞에 놓으려고 했던 현수막이 중국 공안경찰에 압수된 것이다. 원인은 현수막의 ‘역사기행’과 총학생회 이름인 ‘위기탈출’이라는 단어가 공안경찰이 보기에 수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백두산 등정이 1시간 동안 지체됐지만, 다행히도 기행에 동행한 임동석(문과대 중문) 교수의 도움으로 차질 없이 등정은 계속될 수 있었다.

이번 기행에서 백두산의 제일 높은 장군봉(2749m)은 오르지 못했다. 백두산의 절반은 북한의 영역인데, 장군봉은 이 영역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천지의 나머지 절반 역시 먼발치에서 구경해야만 했다. 이 날은 날씨가 맑아 천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현지 가이드인 허룡운 씨는 “7, 8월에 천지를 볼 확률은 5%도 안 되는데 여러분은 운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천지를 본 송다이룸(공과대ㆍ기계공3) 학우는 “말로만 듣던 천지를 실제로 보니 일정이 한 시간 넘게 지체된 것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천지를 뒤로 하고 내려와 점심식사 후 장백폭포로 이동했다. 장백폭포는 백두산 북쪽방향으로 흐르는 폭포로, 중국 북부지역에 있는 폭포들은 대부분 겨울이면 얼어붙지만, 유일하게 겨울에 얼지 않는 폭포이다. 한 시간 가량의 폭포 관람을 마친 참가자들은 숙소로 돌아가 임동석 교수의 중국역사 특강을 듣고 캠프파이어 행사를 가진 뒤 일정을 마무리했다.

8월 26일 셋째 날
셋째 날은 백두산 근처의 숙소를 떠나 세 시간 반 동안 달려 12만 명의 동포들이 살고 있는 연변의 용정시로 갔다. 용정시는 3.1운동 이후 만주지역에서 민족독립의 의지를 나타낸 3.13 반일 대시위가 일어났으며, 항일 독립투사들을 길러낸 6개의 민족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용정중학교는 일제 강점기 저항시인 윤동주의 모교로서, 용정에 있었던 6개 민족학교 중 유일하게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현재 용정중 옛 터에는 대성중학교라는 학교가 들어서 있다. 대성중학교를 떠나 차로 이동하면서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시발점이 되는 강양의 기차역과 터널을 보고 두만강 나루터와 바로 근처의 도문시 공원으로 향했다.

3.1운동의 실패로 많은 동포들은 한을 품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연변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1930년대부터 국경지역인 '도문'에는 선착장이 생겼다. 바로 이곳이 나라 잃고 가족과 생이별하던 눈물의 '두만강 나루터'다. 실제로 가보면 강폭은 그리 넓지 않지만 50m마다 땅굴로 된 초소가 있어 당시에 탈북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두만강 가에서 조선족 할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는 김순영(경영대ㆍ경영4) 학우는 “같은 모습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인데 먼 곳에서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며 분단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두만강에서의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참가자들은 공항으로 가서 다음 일정을 위해 연길에서 북경으로 이동했다.

8월 27일 넷째 날
이날의 첫 목적지는 총 면적이 44만㎡인 세계 최대의 광장, 천안문 광장이다. 광장 안 북쪽에는 중국의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인민들의 넋을 기리는 인민영웅기념비와 중국 초대주석인 모택동의 시신이 보관된 모택동 기념당이 있다. 또, 서쪽으로는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인민대회당이, 동쪽에는 중국국가 박물관이 있다.

광장 앞 큰 도로를 건너 자금성의 입구인 천안문으로 들어가자 자금성의 광활한 모습이 펼쳐졌다. 총 면적 72만㎡, 공사기간 14년에 건립하는데 15만 명의 인부가 희생됐다는 자금성. 관련 수치를 듣지 않더라도 눈으로 그 웅장함을 실감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성안으로 물밀 듯이 들어갔지만 통행에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자금성의 거대함에 놀란 뒤 오후에는 중국 제일의 대학인 북경대를 방문했다. 중국의 정치인 등소평이 현판을 쓴 것으로 유명한 북경대 도서관은 중국을 이끌어갈 최고의 두뇌들이 공부하는 곳답게 학구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도서관에서 길을 따라 쭉 가다보면 유난히 높은 탑 하나가 눈에 뛴다. 바로, 북경대의 상징인 무명탑(이름 없는 탑)이다. 이 탑이 배움터 안의 다른 건물에 가려 안 보이는 일이 없도록 모든 건물은 이 탑 보다 낮게 짓도록 돼있다고 한다. 이후에는 한국의 홍대 거리와 비슷한 중국 예술특구 798거리를 방문한 뒤 북경대에 재학 중인 우리대학 동문선배와의 간담회를 가지고 일정을 마쳤다.

8월 28일 마지막 날
마지막 날은 귀국하는 비행기 출발시간 때문에 일정이 조금 빠듯하게 진행됐다. 만리장성을 가는 도중 길이 막혀 서태후의 여름 별장이던 이화원을 못 가게 될 상황에 처했지만, 다행히도 적절한 시간에 도착하여 이후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지는 않았다. 진시황제가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한 만리장성 중에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은 춘추전국시대 당시의 것 그대로가 아니라 명나라 시대에 보수된 것이라고 한다.

한 시간 가량 끝없이 이어지는 만리장성을 구경한 참가자들은 중국에서의 마지막 점심식사 후 이화원으로 향했다. 12세기 초 건립된 이화원은 1860년에 서구열강의 침공으로 파괴됐다가 서태후가 별장에서 궁전 형태로 변모시켜 재건한 것이다. 너무나 막대한 자금이 들어서 중국이 이 재건비용 때문에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화원 관람을 끝으로 역사기행 참가자들은 북경을 떠나 인천으로 돌아왔다.

기행을 마치고
4박 5일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105명의 학우들. 학우들은 이번 역사기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신은미(법과대ㆍ법2) 학우는 “두만강을 지날 때 북한 땅을 봤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며 “처음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 좋았다”고 소감을 말했다. 하지만, 아쉬움을 드러낸 학우도 있다. 정뉴리(사범대ㆍ음교1) 학우는 “역사기행이지만 탐방한 곳 중에 역사와 관련성이 떨어지는 곳도 있어 아쉬웠다”고 전했다. 이번 기행의 아쉬운 점을 보완해 내년에는 좀 더 참가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내실 있는 역사기행이 되길 기대해 본다.

 

 

 

 

 

 

 

 

 

 

 

 

 

 

 

 

 

 

 

 

 

 

 

 

 

 

 

 

 

 

 

 

 

 

 

 

 

 

 

 

 

 

 

 

 

 

 

 

 

 

 

 

 

 

 

 

 

 

 

 

 

 

 

 

 

 

 

힘들때 딱 한걸음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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