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봄이라. 벌써 이십 년이 훌쩍 지났네요. 지금도 그해 봄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울렁울렁, 첫날밤 맞는 신랑처럼 설레요. 자유, 맞아 자유에요. 그해 봄은 내게 자유를 만끽할 기회를 선사했죠. 열두 해 꼬박 네 가지 가운데 한 개만을 골라야하는 점쟁이연습에서 해방되었으니. 어디 그뿐입니까. 머리를 길러도 담배를 피워도 두들겨 맞을 일, 징계를 당할 일도 없으니 말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 정문은 두려움의 상징이었죠. 그해 봄, 내가 들어서는 장안벌의 정문은 해방으로 인도하는 문이었습니다.

대학 새내기의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정문에 들어서는데, 앗! 이게 뭡니까. 지난 시절 몽둥이를 든 학생주임과 도끼눈을 흘기던 선도부 학생들처럼, 대학 정문 앞에 경찰들이 줄줄이 서있는 것 아닙니까. 학생주임이나 선도부 학생은 저와 같은 소속이었지만 경찰은 동부경찰서 소속, 즉 내가 자유를 누리는 장안벌과는 족보가 다른 종족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른 종족들이 정문을 점령하여 학생증을 검사하고 책가방을 뒤지고 있다니. 내 가방을 뒤지는 순간, 점령군에게 옷이 발가벗겨져 강간당하는 느낌이라 할까……. 절망, 그야말로 지독한 절망이었습니다.

1986년 봄, 장안벌의 봄은 자유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내가 미련했지요. 그 시절이 어느 때입니까. 광주에서 제 나라 시민들을 탱크를 밀고와 살상을 한 뒤에 정권을 찬탈한 머리가 빛나는 아저씨가 대통령이던 시절 아닙니까. 그 시절에 대학 새내기가 되었다고 자유 운운했던, 내가 참 어리석은 거죠.

 정문 앞 불심검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성한 장안벌에 전투경찰들이 들어와 ‘지형숙지훈련’이라는 이름으로 군사훈련을 하였지요. 총학생회가 이에 항의하여 대학본관 앞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어요. 학생들이 하나둘 모이는 것과 동시에 전투경찰들도 장안벌의 자랑인 잔디밭을 군홧발로 짓밟으며 모여들었지요. 집회를 시작하고,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 한 소절이 끝나기 전 애국가를 부르는 학생들을 향해 경찰들이 곤봉을 치켜세우고 달려들어요. 학생들이 도망가자 경찰은 강의실까지 쫓아 들어와 사과탄(수류탄처럼 안전핀을 제거하면 최루가루가 터진다)을 터뜨렸어요. 결국 교수와 학생은 교문 밖으로 가방을 싸들고 피난을 갔고, 다른 종족들이 장안벌을 점령하여 족구를 하고 있던, 내 자유의 환상을 완전 짓뭉갠 봄이었지요.

후배님들, 요즘 장안벌은 어떻습니까? 자유를 만끽하시는지요? 아니, 얼굴들이 어둡네요. 그 망할 놈의 취업 때문이군요. 저희야 구속된 자유를 찾고자 열 받으면 짱돌이라도 던졌고, 막걸리를 사다놓고 일감호를 바라보며 밤새 취하면 됐는데, 요즘은 화풀이 할 곳도 없다고요. 한 해에 일천만 원씩 내며 공부를 하는데 제대로 된 일터, 안정된 밥줄은 보이지 않는다고요. 군사독재정권보다 더한 괴물이 후배님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요. 오호통재라! 이 일을 어찌 하리오. 다 이게 못난 선배들 때문 같군요. 그 시절 그토록 외치고 싸웠던 자유, 민주, 너무도 허술하고 허약했네요. 자유, 결코 홀로 누릴 수도 홀로 얻을 수도 없어요. 다시 함께 손잡고 찾아야 할 때가 되었군요. 저와 당신이 함께, 장안벌의 자유를.

시인 오도엽

1986년 건국대 경제학과에 입학을 했다. 창원공단에서 공장노동자로 15년간 일했지만, 지금은 시인, 르포작가,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경향신문>, 월간 <작은책>에 글을 연재하고 있고, 시집 <그리고 여섯 해 지나 만나다(실천문학사)> 기록문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후마니타스)>를 펴냈다.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