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 작가의 소설은 황당하다. 소설은 물론 허구를 다루는 장르다. 하지만 허구의 이야기와 황당한 이야기는 같지 않다. 천병관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 같이 독특하고 톡톡 튄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가의 이야기에 수긍하게 된다.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황당한 이야기가 어느새 우리 옆집에서 일어난 일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놀라운 입담이 발휘되는 대목이다. 황당하지만 진솔한 소설을 쓰는 작가 천명관은 우리 곁에 살고 있는 소시민들의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맛깔나게 ‘썰’을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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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고령화 가족’에서는 평균 나이 사십 구세의 구질구질한 낙오자들이 한 가족으로 나온다. 70세가 넘은 노모의 집에 전과자 첫째 아들, 에로 영화감독 둘째 아들, 퇴폐다방 마담 딸, 일진 조카 딸 까지 듣기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조합으로 소설은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놀라운 것은 소설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엉뚱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막장 인생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면서 서로 부딪히면서 그들 인생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인공인 둘째 아들이 몰랐던 가족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자기 성찰과 가족의 의미,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내용이 확장 된다. 작가는 능청스럽게 독자들에게 예기치 못한 순간에 진지한 질문을 한다.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수록된 ‘프랭크와 나’를 읽으면 사촌인 프랭크와 랍스터 사업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간 남편의 이야기가 나온다. 남편은 미국에서 프랭크와 온갖 소동을 벌이며 황당한 사건들에 연루되는데 막상 프랭크는 단 한번, 그것도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 역시 남편의 외도를 짐작하고 자살을 하려는 마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편에게 편지를 쓴 마님은 두서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정작 마지막에 딱 한 번 출연하는 하녀 마리사의 말 한 마디로 사건은 모든 것이 연결됨과 동시에 종결된다. 제멋대로 벌어지는 듯 보이는 그의 소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인물사이의 관계성이다. 이질적인 관계의 충돌을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넌지시 질문을 툭툭 던진다.

천명관의 소설이 단순한 황당함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삶에 대한 해학적 통찰이 있어서다. 낯선 이야기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읽어보면 친숙한 우리의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작가의 소설은 유쾌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부족함이 가득한 인물들이 벌이는 한바탕 소동 속에서 인간이 사회와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지를 보여준다. 한참 웃다가도 문득 나 자신과 소설 속의 인물이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발버둥 치는 모습이 정작 자신과 다를 바가 없다. 천명관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사회를 비틀면서 힘을 내라고 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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