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청년들은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는다. 또한 안철수의 강연에 참석하여 그에게 환호를 보낸다. 이상의 두 가지는 개인의 취향과 기호를 넘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재미있는 것은 청년들이 위 책과 위 인물에 대하여 공통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저들이 자신들을 ‘위로’한다는 이야기이다.

헌데 생각해보자. 어느 부자가 집 앞에 있는 거지를 보고 “힘들지? 다 잘될거야. 우리 힘내자. 뿌잉뿌잉” 외친다 한들 그 말들이 거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이는 극단적인 예이지만, 그럴지라도 김난도와 안철수는 이미 월등한 사회적 성취를 이룬 주류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성세대이다. 그런 그들이 진정 이 시대의 청년을 위로할 자격이 있을까.

그들이 과연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알바몬이 되고, 취업을 위해 인격이며 자존심까지 다 버리고 고개 숙여야만 하는 청년의 현실을 상상할 수 있을까. 거지가 아침에 눈뜨고 저녁에 눈감아야할 때까지 겪어야하는 처절한 현실을 부자는 온전히 상상할 수 없을진대, 그것은 거지의 상황이 부자에게 현실일 아니기 때문이다. 김난도와 안철수는 우리의 상황을 현실로 겪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우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일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아닌 척해도 결국 ‘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온전한 이해조차 불가능한데 무슨 위로란 말인가. 따라서 그들의 말의 적실성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그들의 말에 ‘위로’받아서는 안된다. 그들의 위로는 청춘이 처하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한낱 마취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의하여야 한다.

거지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상황에 처한 거지뿐이듯, 청년을 위로할 수 있는 것도 청년뿐이다. 청년은 청년과 어깨동무하며 위로하여야 하고, 연대하여서 위로받아야 한다. 동시에 청년을 위로할 수 있는 언어는 같은 처지에 있는 청년의 언어뿐임을 명심하고, 청년 세대의 언어를 생산해내야 한다. 기성세대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식의 어줍잖은 위로로 다가올 때 이를 단호히 거부하자. 우리 스스로가 서로를 위로하여야 하고, 나아가 위로와 안위를 딛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행동하여야 한다. 명심하자. 청년에게는 청년만이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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