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명이 넘는 아까운 목숨들이 침몰한 배 안에서 희생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아직도 많은 실종자가 구조되지 못하고 있다. 이 대참사는 혼란과 공포 대신 탄식과 분노를 낳고 있다. 악마가 저지른 참극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 믿어 왔던 기업과 정부의 부패, 무능, 무책임이 낳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느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직감하고 있는 위기의 본질은, 우리사회가 공공성(公共性)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공공성의 위기다.

공공성은 첫째,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공동의 것에 관여하거나 참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시민들은 미안하다고 말한다. 이 지경이 되도록 자본과 권력의 부패와 무능을 방관해 왔던 것이다. 공동의 것에 관하여 우리는 너무도 무관심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에는 죄책감이 드리워져 있다.
둘째, ‘누군가가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고 대표한다’는 의미가 있다. 승객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책임져야 할 선장과 선원들은 제복도 벗은 채 자신만 살겠다고 탈출했다.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라는 헌법의 명령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로 하여 공허하다. 국민은 대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편파적이지 않고 올바르다’는 의미로 쓰인다. 불편부당하기 위해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규제완화, 비정규직, 민영화 등으로 대한민국호는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 현장, 철거민들의 농성 현장, 평생의 삶터를 지키려는 지역주민들의 시위에는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진격하던 공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구하는 데는 얼마나 무능하고 초라하고 비겁한지를 보았다.
넷째, ‘사람들에게 드러내 밝히고 알린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민심을 존중하고 진실을 알려야 할 언론은 은폐와 조작, 혹은 편향된 시각으로 언론의 기능을 상실했다. 기자들은 ‘기레기’가 되었다. 시민들의 집회와 시위,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국가라기에 무색할 만치 위축되어 있다. 국가는 시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 한다.
마지막으로 공공성은 ‘무엇인가에 다수가 공감하고 동의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국가적 재난 앞에서도 우리 사회는 함께 슬퍼하지 못하고 있다. 미개인이니 백정이니 하는 비아냥만 있을 뿐, 함께 한바탕 울고 나서 이 슬픔을 이겨낼 힘과 지혜를 모으려는 노력은 없다. 돈보다 생명이 먼저인 사회를 만들자는 공론으로 우리 사회 곳곳을 돌아보면 좋지 않을까?

위기는 우리에게 그 위기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 우리가 지금의 공공성 위기를 관성적인 처방이나 편협한 정치적 견해로 대응할 때 위기는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정부와 국민이 함께 공공성의 회복을 위해 온 힘과 지혜를 모아 실천해야 하는 까닭이다. 국가와 국민이 지키지 못한 안타까운 목숨들을 부디 기억하자. “진보는 변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기억에 달려 있다. 경험을 잘 기억하고 잘 적용하지 않는다면, 미성숙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진부한 산타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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