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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바다의 전설로 남다
건대신문사 | 승인 2014.10.01 16:41

최근 영화 ‘명량’이 1,7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이순신(1545~1598) 장군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치솟고 있다. 이순신으로 대표되는 수군의 승리는 의병의 항쟁과 함께 임진왜란 이라는 국난 극복의 가장 큰 힘이었다.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하여 각종 군기와 군사시설을 점검하고 해전에 능한 병사 및 선박을 확보하였다. 특히 왜란 직전에는 거북선 건조에도 힘을 기울여 4월 11일경 제작을 끝내고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시험 발사하면서 만일에 있을 전투에 대비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후 일본군은 육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해로를 확보하여 물자 보급에 만전을 기하려 하였다. 1592년 5월 4일 마침내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옥포 앞바다에서 만났다.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어선) 46척을 이끌고 이순신 함대는 5월 7일 30여 척의 일본 함대를 발견하고 26척을 격침시켰다. 조선 수군은 단 1명만 다친 완벽한 승리였다. 5월 29일에서 6월 10일까지 전개된 사천해전에서는 처음으로 거북선을 활용하여 대승을 거두고, 당항포 해전에서 연이어 승전보를 올렸다.

이순신 함대의 출동으로 바닷길을 통한 군수물자의 보급이 어려워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 힘을 실어주었다. 1592년 7월 7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70여 척 함대는 견내량에 도착했다. 견내량 바깥 바다에 머무르며 지형을 살핀 이순신은 포구가 좁아 판옥선이 서로 부딪칠 위험이 있고, 적이 육지로 도망칠 수 있는 곳임을 간파하고 한산도 앞 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했다. 1592년 7월 8일 5척의 판옥선을 쫓아온 일본함대는 한산도 앞바다까지 왔고, 이순신 함대는 학의 날개형으로 큰 원을 그리며 전투대형을 짰다. 이것이 바로 학익진(鶴翼陣) 전술이었다. 적의 함대가 날개 안으로 들어오면, 양쪽 날개를 오므리면서 적을 둘러싸고 총포를 쏘아 댔다. 화포의 명중률이 낮기 때문에 최대 효과를 거두기 위한 전술이었다. 바로 이때, 칼송곳으로 무장한 거북선 2척이 적의 함대를 뚫고 돌진해나갔다. 거북선이 사방에서 총포를 쏘아대자 적의 함대는 불길에 휩싸였고, 거북선과 부딪칠 때마다 적의 함대는 수없이 부서져 나갔다. 이어서 판옥선들은 적의 배를 들이받으며 공격을 펼쳤다. 이날 일본 함대는 73척 중 66척이 침몰되고 붙잡혔으나, 조선 수군의 군함은 단1척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 전투가 바로 한산도 대첩이다. 한산도 대첩은 1597년 정유재란 시기에 벌어진 ‘명량 대첩’과 함께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시기 단 한 번의 패전도 하지 않으며, ‘불패의 신화’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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