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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에 잠들어 있는 보물찾기개교 기념일을 맞아 우리대학 박물관을 찾아가 보자
홍미진 기자 | 승인 2003.05.13 00:00

우리 캠퍼스 안에 학생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이 어딜까? 바로 새천년관 앞의 큰 사거리일 것이다. 우리대학 상징인 힘찬 황소상이 서있는 넓직한 잔디밭과 일감호를 배경으로 한 로멘틱 드라마의 현장, 청심대를 양 옆에 둔 이 사거리가 바로 장한벌 교통의 맥이다. 그러나 이곳을 지날 때면, 항상 무언가 아쉬움이 있었다. 바로, 도서관으로 가는 오르막길 옆에 위치한 붉은 벽돌건물 때문이다. 직접 올라가 보고는 싶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인 것 같아 가기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엔 건물이 너무 멋져 자꾸 신경이 쓰이는 그 아쉬움을 시원스레 해소해 보자.

■박물관에서 만난 상허 유석창 박사

언제나 궁금하기만 했던 알 수 없는 건물.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상허 유석창 박사의 흉상이다. 우리대학과 민중병원 설립을 통해 당시 일제의 압박과 분단의 설움을 겪고 있던 민족의 아픔을 다독이려 했던 인물.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일우(一憂, 이 분의 호에서 일우헌이라는 명칭이 나왔다) 유승균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 그는 우리 민족의 건강과 교육과 식량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우리의 주식인 쌀을 지키기 위해 농촌 부흥운동을 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민중병원의 시초인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을 세웠으며, 분단의 위기에서 나라를 바로 세울 젊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건국의숙’을 건립했다.

바로 이 ‘건국의숙’이 조선정치학관에서 정치대학을 거쳐 건국대학교로 이어지는 것이다. 당시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했던 건국의숙은 85년 우리대학 캠퍼스로 이전되었고, 바로 지금 기자가 들어가 있는 현재의 건국대학교 박물관 건물이 된 것이다. 상허 선생 조각상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돌면 조선시대 독립투사들의 비밀거처인 듯한 느낌의 전시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가장 크게 걸려있는 그림이 일제시대 때 독립투사들의 얼굴을 담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 양복을 입은 사람의 왼쪽에 앉아있는 흰 한복에 검은 테 안경을 쓴 분이 바로 상허 선생의 선배이자 우리대학의 전신인 정치대학의 초대 학장, 오하영 목사라고 한다. 다정한 여유와 엄격한 면이 엿보이는 인물이다. 우리대학의 설립자와 초대 학장이 모두 나라가 어려울 때 민족을 위해 평생을 바친 분들이라니, 마치 친아버지가 자랑스러운 것처럼 으쓱해지는 것은 비단 기자 뿐만은 아닐 것 같다.

■우리대학의 이런 보물들이!

암울한 시대, 민족을 사랑하는 길이 목숨을 던지는 험난한 길이어야만 했던 그 시대의 긴장과 의지가 가득한 전시실에서 나와, 올라간 2층 전시실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이 아담하게 담겨있다. 구석기시대의 주먹도끼, 철기시대의 화살촉, 고려시대 유물인 청자와 조선시대의 백자 등 국사교과서에서 자주 봤던 다양한 유물 뿐 아니라 TV사극에도 많이 등장하는 노리개, 붓걸이, 경대 등 흥미로운 볼거리가 가득하다.

그러나 단연 눈에 띄는 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동국정운’과 ‘율곡 이이 선생가 분재기’. 동국정운은 ‘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는 국보로서,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직후 우리나라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 음으로 표기한 책이란다. 국내외를 통틀어 동국정운 6권을 모두 소지하고 있는 곳은 우리 대학의 박물관 뿐이라는 말씀!

동국정운이 놓여있는 선반 위엔 ‘율곡이이 선생가 분재기’가 걸려있다. 이것은 율곡 이이선생의 아버지 사후에 자손들이 모여 재산을 분배한 내용을 담은 것인데, 놀라운 것은 조선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시집간 자매를 포함한 4남 3매가 재산을 균등히 분배했다는 점이다.

얼마전만 하더라도 문중의 산을 정부가 사용하면서 지급하는 배상금 분배문제로 법원까지 갔다가 결국 혼인한 딸에게는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판결까지 났다고 한다. 율곡 이이선생의 누나도 남동생과 차별 없이 재산을 나눠 받았는데, 2003년 밀레님엄 시대의 누나들은 결혼했다는 이유로 재산분배를 받지 못한다. 과연 남녀평등의 역사는 역행하는 것일까? 이 모순의 시대에 보란 듯이 내보일 수 있는 남녀평등의 생생한 증거가 바로 우리의 무관심에 잠들어 있는 박물관 진열창 속에 숨쉬고 있다.

그 옆으로 가니 도장같이 생긴 자그마한 것들이 빼곡히 놓여있다. 국화무늬, 빗살무늬 등이 세겨진 사기로 만든 도장들. 알고 보니 조선시대 때 쓰였던 ‘떡살’이라고. 떡살이란 떡에 무늬를 내는 도구란다. 이 귀엽고 소박한 도장들이 빨간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는 것이 아니라, 참기름 냄새 구수히 나는 윤기 흐르는 떡에 꾹 찍어내는 것이라니. 이것들이 모두 우리대학 홍철화 동문이 수집해온 300여점을 기증한 것이라고.

우리대학의 ‘민족’이라는 이름을 증명해 주는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고 박물관에서 나오니 올라올 땐 보지 못했던 투박한 4층 석탑이 나온다. 이것은 고려시대 것으로 일본인이 가져가려고 하는 것을 우리대학 정삼태 동문이 모든 경비를 물고 사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그의 자손들이 “평소 아버님의 뜻이었다”며 기증했다고 한다.

우리대학 또 하나의 알 수 없는 비밀의 건물. 이과대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한옥이다. 바로 ‘사직동 정재문가’. 헌종 별세 후에 당시 세도정치의 핵심인 안동 김씨가 그들의 허수아비 철종을 임금으로 세우면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하전을 모함해 죽였는데, 그 이하전의 제사를 받드는 집이었단다. 구한 말부터 일제시대까지 한옥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이 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놓이자 78년 당시 우리대학의 곽종원 총장이 우리대학으로 이전시켜 놓았다고.

■문화재를 사랑할 줄 아는 건국인

떡살, 고려시대 석탑, 사직동 정재문가. 민족의 아픔을 보듬기 위해 상허선생은 우리대학을 세웠고, 그 제자들은 없어질 위기에 놓인 문화재를 하나하나 챙겨 곱게 모셔놓았다.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 만들고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어가는 우리대학. 그 사랑을 가득 담고 있는 증거들이 곳곳에 놓여 우리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다. 좀더 천천히 걸어야하지 않을까? 좀더 주위를 둘러봐야하지 않을까?

홍미진 기자  lerryd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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