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이후 인간은 일하지 않으면 죽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에 기인해서 J. 칼뱅 같은 이는 ‘예정설’을 말하면서(사실 이도 성경의 몰이해에 기인할 뿐이다.) 사람들을 일터로 ‘인도’하였고, 부를 축적한다는 것, 곧 이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천국으로 가는 열차의 표로 담보되었다. 막스 베버가 개신교의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성장에 커다란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꼽은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이러한 인식들은 자본주의를 구축시켜왔던 ‘근대’의 중심적인 논리였으며, 인간해방을 ‘외친다’던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에서조차, 노동 영웅을 만들어내면서 자본주의와의 국제적 ‘경쟁’에 매진한 역사를 반복할 만큼 극복하기 힘든 것이었다.

최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경쟁력’이라는 단어 하나에 종속되고 있는 현실이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는 인간에 대한 연구를 한다는 심리학, 철학 등 인문학마저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서, 상품으로 키울 수 있도록 연구해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농민이 분을 못 이겨 할복을 하여도, 노동자가 분신을 하고 투신을 하여도, 항상 앵무새처럼 들려오는 답변이다: “국제 경쟁력”, “성장“...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이후 이제 그들은 그나마 구색 맞춰놓았던 브레이크조차 걷어버릴 따름이다. 이윤과 부합되지 않는 자들은 사회에서 ‘퇴출’을 각오해야 하며, 그에 앞서야 할 최소한의 인간의 권리(인권, 휴식을 취할 권리 등)는 망각된 지 오래이다.

당신은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선택해야할 것은 ‘성장, 경쟁, 이윤’을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반대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양승훈(정치대·정외과3)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