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근(이과대ㆍ화학83학번) 동문 인터뷰

새내기 학우들과 고학년 학우들이 10ㆍ28 건대항쟁에 대해 품고 있는 궁금증을, 10ㆍ28 건대항쟁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허세무(문과대ㆍ불문98졸) 동문 그리고 10ㆍ28 건대항쟁을 직접 겪은 최호근(이과대ㆍ화학83학번) 동문과의 대담을 통해 풀어보았습니다.

▲ © 추송이 기자
10ㆍ28 건대항쟁 당시 경찰은 거의 의도적으로 학생들을 포위했습니다. 우리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올 때는 전혀 막지를 않았는데, 집회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경찰들이 진입해 학생들의 대열을 가로 막았죠. 학생들이 수천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은 ‘황소 30’이라는 작전에 따라 학내 모든 통로로 진입했는데 학생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밀리다 행정관, 사회과학관 등으로 대피했습니다. 건물로 들어간 학생들은 옥상에서 던질만한 것은 모두 던졌습니다. 화염병은 학교에 잔디가 많은 탓에 터지지 않아 심지어 화장실 변기까지 던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나흘 동안 학생들은 입을 것, 먹을 것이 모자라 담배 한 가치도 나눠 피고, 초코파이 하나를 몇 명씩 나눠 먹으며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교수님이 여학생들에게 줄 생리대를 하나하나 옷 속에 숨겨 가져오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지고요. 그리고 건국문에서 법과대로 가는 길에는 ‘장미터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장미터널의 철근을 뽑아 학생들을 진압하는데 썼습니다. 그 이후 장미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장미터널을 없애는 사태까지 벌어졌죠.

10ㆍ28 건대항쟁 이후 수많은 학생이 체포됐습니다. 그 때 당시 저는 백 명이 넘는 학생들과 한 경찰서로 잡혀갔습니다. 강력계로 끌려갔는데 경찰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죠. 8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경찰에게 취조를 받으면서 후배들까지 맞는 것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은 기소유예나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너무 많은 학생들이 연행됐기 때문에 서울 시내 거의 모든 대학이 총학생회 선거를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학생회 선거 결과 10ㆍ28 건대항쟁에 참가한 학생들이 대부분 총학생회 임원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런 탓에 운동권의 대오는 더욱 견고해졌고,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생기게 됩니다.
과거 반외세ㆍ반독재를 외치던 학생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냐고 되물을 후배들도 있을 수 있지만, 과거 선배들의 치열한 이념논쟁과 실천적 자세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지속적인 홍보를 통해 10ㆍ28 건대항쟁을 알리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고, 우리대학이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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