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무(문과대ㆍ불문98졸) 동문 인터뷰

새내기 학우들과 고학년 학우들이 10ㆍ28 건대항쟁에 대해 품고 있는 궁금증을, 10ㆍ28 건대항쟁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허세무(문과대ㆍ불문98졸) 동문 그리고 10ㆍ28 건대항쟁을 직접 겪은 최호근(이과대ㆍ화학83학번) 동문과의 대담을 통해 풀어보았습니다.

▲ © 추송이 기자
1986년 10월 28일 서울 소재 26개 대학 학생들이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아래 애학투련)이라는 조직 결성을 위해 우리대학에 모였습니다. 애학투련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80년대 두 개의 운동권 노선을 통합한 학생운동 조직으로 반외세와 반독재를 주장했죠. 지금 한총련의 전신이라고 보면 됩니다. 애학투련의 발대식을 하려고 하는데 정부에서 경찰들을 학내에 투입했습니다. 3박 4일 동안 사회과학관과 옛날 법과대 건물 등에 학생들이 억류된 채로 투쟁했던 사건을 우리는 ‘10ㆍ28 건대항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당시 언론은 정부의 검열 때문에 10ㆍ28 건대항쟁에 대해 왜곡보도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대학에 있던 학생들은 좌경용공, 빨갱이라고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결국 항쟁에 참가한 1520명의 학생들이 체포됐고 그 중 1290명이 구속됐습니다.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구속자 기록을 내 기네스북에 올랐을 정도입니다.

10ㆍ28 건대항쟁 당시 가장 처절한 싸움이 벌어진 곳은 사회과학관입니다. 그 곳 앞에 지금의 10ㆍ28 건대항쟁 기념 동상이 서있습니다. 원래는 지금의 동상이 아니었습니다. 원래의 동상은 세우자마자 군사정권이 탈취해 갔기 때문에, 법정 싸움을 통해 다시 찾았죠. 그러나 너무 많이 훼손돼 재학생과 동문들이 다시 모금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돈으로 세운 것이 지금의 동상입니다.

10ㆍ28 건대항쟁이 일어난 후 20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독재정부에 대한 승리와 패배로 갈립니다. 승리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10ㆍ28 건대항쟁이 운동권 노선을 통합하고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한총련 결성의 조직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투쟁의 성과가 없고 오히려 독재정부에 비참하게 무릎을 꿇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패배한 운동으로 평가합니다.

지금 우리는 독재정권의 그늘에서는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외세에 주권을 침해당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20년 전에 선배들이 주장했던 반외세 싸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배들이 왜 그렇게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는지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10ㆍ28 건대항쟁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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