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나의 첫사랑은 어땠는가, 현금 일억 원이 생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이는 김홍신 석좌 교수의 수업 주제다. 지루하고 졸린 강의가 아닌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강의에 학생들의 발걸음이 몰린다. 김홍신 작가는 1981년 최초의 밀리언셀러 소설 <인간시장>의 저자였고, 제15ㆍ16대 국회 의정평가 1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우리대학 국문과 학사, 석사, 박사, 그리고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선배이자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인기를 끌고 있다. 김홍신 작가를 만나 그의 젊은 시절과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660119, 국문과 20명 중 19등 김홍신
김홍신 작가는 소설가, 시민운동가, 방송인, 교수 등 여러 분야에서 성공한 유명인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집에 방문해 그의 얘기를 들으며 그가 단지 성공만 한 사람이 아니라 이면에 ‘실패가 더 많은 담백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김홍신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의 바람대로 의대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의대 시험에서 떨어졌고, 재수를 했지만 건국대 국문과에서도 떨어지는 아픔을 맛보았다. “고민을 많이 했어. 자존심이 못 견뎌 살면 뭐하나 하는 생각으로 공책에 크게 유서를 써놨어. 그런데 부모님이 안 보시는 거야. 며칠 째 그렇게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 후에야 추가합격 통지서를 받았지.” 과거에는 학번을 등수로 매겼다. ‘660119’ 그는 국문과 20명 중 19등으로 합격한 운이 좋은 학생이었다.

 

 

▲ ⓒ 김용식 기자

 



‘깡’끼 있는 대학생 김치국, 낭만을 즐기다

대학에 들어가서 그는 그리 고분고분한 학생은 아니었다. 취업이 잘 되지 않는 소위 ‘국물과’였던 국문과에서 김홍신 작가는 낭만을 즐기는 대학생들 중 하나였다. 그는 기숙사 생활 했던 것을 아름다운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난 재수하고 66년에 입학했으니 1학년들이 나보고 홍신아 하고 이름 부르면 환장 하겠는 거야. 근데 기숙사 들어가면 꼼짝 못하지. 자존심은 상하지만 1년 차이면 할아버지 뻘이니까.” 밤마다 선배들은 후배들을 불러 팬티바람으로 일감호를 뛰게 하는 벌을 주었다. 그때 1학년이었던 김홍신 작가를 포함한 2,3학년 몇몇이 “그만합시다” 하고 선배들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야 사건은 무마되곤 했다. 그는 “깡끼 있는 사람들끼리 친해져 선배들과도 많이 통했지”하며 웃음과 함께 잠시 그때 기억에 잠겼다. 당시 ‘깡끼 패거리’는 기숙사 사감선생님, 식당 아주머니와 친해졌고, 규율반 선배들도 그들의 낭만을 눈감아 주었다. “달이 휘영청 뜨면 고향생각도 나고, 미치는 거야. 그럴 땐 친구들을 불러 달밤에 막걸리 한 잔 마시며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곤 했지.” 김 작가는 그때의 기숙사 생활이 소설을 쓰는 것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당시 학생 수가 적은 대학의 모습을 ‘친교의 장’이라고 회고했다. “내 친구가 법과대에 있고 또 다른 친구는 축산과면 학교 전체가 내 친구가 되는거지. 그땐 동류의식이 있었어.” 그 시절은 핸드폰, 심지어 전화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숙집에도 전화가 없어 집에 편지를 통해 소식을 전해야 했고, 학교 친구를 만날 때도 그 건물에 직접 찾아가 쪽지를 남기는 것이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그래서 동아리 활동이 활성화됐다. 특히 문학분과가 동아리의 꽃이었다. 김 작가는 “문학 동아리가 잘되는 이유가 여학생 숫자가 많아서지” 하며 허허 웃음을 지었다.

입학하면서부터 학보 문화상 소설부문에 당선된 김홍신 작가는 학교에서 스타였다. 당시 소설가는 지식인, 지성인의 집단으로 엄청난 명예를 가진 자리였다. 학보 문화상에 이어 연재소설까지 썼으니 그 인기가 알만 하다. “내 아르바이트는 글쓰기였어. 내 필명은 기억하기 쉽게 김칫국과 비슷한 김치국으로 지었고. 같은 김홍신 이름으로 맨날 쓰면 안되니까. 여러 필명으로 글을 쓰고 원고료는 내가 받고. 쏠쏠한 아르바이트였지”

 

 

▲ ⓒ 김용식 기자

 



김홍신을 소설가로 키워낸 두 번째 부모님, 나의 스승님

김홍신 작가가 입학할 당시 십여 개의 문학동아리가 ‘건국문단’ 하나로 통합된 시기였다. 건국문단에서 활동하던 김홍신 작가는 전국 문화예술축전 소설부문에 당선됐다. 당시 문화예술축전 심사위원을 맡은 곽종원 평론가는 건국대학교 총장이었다. 곽 전 총장은 소설부문에 당선된 자신의 학교 학생 김홍신을 눈여겨 보았고, 그때 이후로 김 작가는 총장실에서 공부를 하게 됐다. “담뱃값도 전전긍긍하던 그때, 두세 시간 붙잡혀 있다가 비서실장님에게서 담배 한 갑 얻어 돌아오곤 했지.” 또 한 분은 김 작가를 아들처럼 여기며 소설가로 키우신 임옥인 선생이다. 데모를 하다 그가 잡혀가면 당시 보직이 높진 않지만 영향력이 컸던 소설가 임옥인 선생과 대학 총장의 입김으로 그는 금방 풀려나곤 했다. 그런 특별한 사랑으로 그는 점점 완전한 소설가로 성장했다.

 

 

▲ ⓒ 김용식 기자

 



자상한 아버지와 냉정한 어머니

두 스승의 가르침의 씨앗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옥토는 부모님이 미리 마련해 두셨다. 그는 “아버지가 자상하고 어머니가 냉정했어. 거꾸로야. 아버지가 워낙 말씀을 안하셨어.” 약주를 좋아하셨던 그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도 남의 욕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불렸다. 그의 아버지가 음주 뺑소니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그는 뺑소니 친 사람을 바로 다음날 용서했다. “어제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오늘 내가 용서하다니 나도 많이 당황했어. 그래도 한 선배의 물음으로 그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당시 그가 말한 선배는 홍기삼 동국대 전 총장이었다. 홍 전 총장은 김 작가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실 것 같아?”라고 질문했다. 이에 그는 “우리 아버지는 백발백중 용서하라고 하셨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대답을 뱉은 후 그는 마음이 편해졌다고 고백했다.

조용히 용서의 삶을 가르쳐 주신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냉정한 분이셨다. 그 시대에 그를 유치원에까지 보낸 그의 어머니는 외아들을 군대에 보낼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강인한 여인이었다. 김 작가는 어린시절 장애가 있는 친구를 놀린 것을 어머니에게 들켜 그 친구에게 가서 용서를 빌어야 했던 기억을 꺼냈다. “나는 어머니 앞에 부끄럽지 않은 곧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했지.” 또한 김홍신 작가가 민주화운동을 할 때에도 어머니는 아들이 옳은 길을 가도록 지도해 주셨다. 그가 인간시장을 집필하면서 강경발언 때문에 협박받고 자식들의 유괴를 걱정할 시기에 어머니는 그에게 큰 힘이었다. 신문에 김홍신이라는 이름이 실리면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와 먼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내가 이렇게 키웠다. 너가 이해하고 살아라.” 한마디 하고 다시 돌아가셨다. 김홍신 작가는 그랬던 어머니가 내가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며 어머니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거듭 반복해 말했다.

“인생은 잘 놀다가지 않으면 불법이다!”

바르지만 아픈 길을 살아온 김홍신 작가에게 대학생들이 살아가야 할 인생에 대해 물었다. 김홍신 작가는 한국인들, 특히 한국 젊은이들의 가장 큰 문제가 열등감이라고 지적했다. 또 세계경제교역 10대 강국이고, 올림픽 5위의 근사한 국가에 사는 우리들이 열등감으로 인해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열등감 느끼는 것은 견딜 수가 없어. 왜 자꾸 안달을 하는지, 우리 국민들이 자존심을 세워야 할 때가 됐어”라고 강조했다.

김 작가는 이어 세상의 중심이 어디냐고 질문했다.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 서있는 그 자리다. 다른 것들에 묶여 사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젊은이들에게 “주눅드는 순간, 자기 인생 망가지는 거지. 그러니까 나만이 가진 개성을 살리면 돼”라고 조언했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잘 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즐겁게 살아가면 남도 즐거워지고 우리가 즐거워진다는 말이다.
자신의 삶을 주인답게 살아가며, 당당하고 행복한 후배들을 기대하는 김홍신 작가의 남은 행보도 기대된다.


▲ ⓒ 김용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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