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비극적 현실을 담아낸 수작’이나 ‘혼란한 시대 상황을 잘 반영한 영화’라며 높게 평가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진짜’ 세계를 때로는 영화와 같은 다른 무언가를 통해 비춰보고서야 더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경우가 있다. 지난 2010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바로 우리의 현실을 다시 살펴보게 하는 영화 중 하나다. 서정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제목과 달리, 영화는 ‘성폭력’이라는 큰 사건을 배경으로 두고 진행된다. 성폭력 문제 자체가 전면에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사건은 영화 속에서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하며 인물의 감정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각 인물들이 사건과 맞닥뜨리고 보이는 반응과 태도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누군가는 고통 받지만 대부분은 그저 무심하게 흘려버리는, 그래서 때론 무서운 현실. 그리고 이것은 시를 쓰기 위해 아름다운 것을 찾으려는 미자의 노력과 대비되어 더욱 명확하게 다가온다. 잔잔히 진행되는 영화인데도 보고난 뒤의 기분이 그리 개운치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뛰어난 영상미나 화려한 효과 대신 곱씹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 바로 ‘시’다.

‘시’의 줄거리: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사는 66세 할머니 ‘미자’는 꽃을 좋아하고 꾸미는 걸 즐기는 소녀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강 노인을 돌보는 일을 하며 빠듯하게 살아가지만, 미자는 시 쓰기 강좌를 들으면서 ‘아름다운 것’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러던 중, 미자는 손자 종욱이 친구들과 함께 성폭행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와 함께 얼마 전 자살한 소녀 희진이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죽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미자는 이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손자 종욱은 사건을 외면할 뿐이다. 종욱과 함께 성폭행을 저지른 아이들의 아버지들 역시 미안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 희진 어머니와의 합의를 위해 3천만 원을 모으기로 하고, 미자 역시 500만원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어느 날 강 노인은 ‘남자구실 한번 해보고 죽고 싶다’며 미자를 붙잡고 이에 미자는 그 집을 뛰쳐나온다. 500만원을 빌리지 못한 미자는 강 노인을 찾아가 관계를 맺는다. 합의를 마무리하기 위해 모인 자리, 미자는 합의금을 넘겨주면서 ‘신고를 하지 않으면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미자는 종욱에게 비싼 음식을 사주고, 그날 밤 경찰이 찾아와 종욱을 데려간다. 그리고 시 강좌의 마지막 수업 날. 수강생들 중 미자만 혼자 시를 완성한다. 희진의 세례명을 딴 ‘아네스의 노래’가 미자와 희진의 목소리로 낭송된다.

토론 참여자: 박철영(상경대ㆍ경제2), 이소민(정치대ㆍ정외2) 학우

영화 ‘시’ 재밌게 보셨나요? 전체적인 감상평이 궁금해요.

이소민(이): 내용이 천천히 전개되는 영화라 보면서 충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편으로는 현실이 별로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했죠.
박철영(박): 좋았지만 조금 어렵기도 한 영화였어요. ‘시’가 영화를 관통하는 단어인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시를 찾는 과정은 인생을 찾는 과정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속에서 시를 쓰려면 ‘사물을 제대로 보라’고 얘기하는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가치관 등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는 담담하게 진행되지만, 의외로 관객들에겐 충격적일 수 있는 장면들이 꽤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 장면들에 대해 얘기해 볼게요. 영화 속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들은 무엇이었나요?

박: 미자가 손자의 범죄에 대해 처음 알게 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미자는 성폭행에 가담한 학생의 아버지들이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야 비로소 손자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죠. 저는 그 장면이 일종의 폭력을 나타내는 거라고 봤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가해진 충격, 그것은 미자에게 폭력이나 다름없는 거죠.
이: 저는 자살한 소녀의 이야기에 모두가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인상 깊었어요. 소녀가 왜 죽었는지 궁금해 하는 미자의 말을 다른 아주머니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아버지들은 사건을 덮는 데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잖아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 미자 혼자 소녀를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죠. 죽은 소녀의 위령미사에 찾아가는 모습도 그렇고, 소녀의 사진을 들고 가는 것도 그렇고요. 이런 면들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나타낸 것 같았어요.
박: 네 맞아요. 또, 미자가 강 노인과 성관계를 맺는 장면도 충격적이었어요. 그것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미자에게 가해진 일종의 폭행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미자가 원했던 상황은 아니잖아요. 여러 상황들이 미자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자살한 소녀 희진과 미자가 비슷한 것 같아요. 희진을 그렇게 몰고 간 상황이 있었던 것처럼, 미자 역시 현실에서 결국 ‘성폭행’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요. 마지막 장면에서 미자와 희진의 목소리가 교차되는 장면은 이런 점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요.
이: 그건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르네요. 저는 미자가 스스로 그런 결정을 선택했다고 봤거든요. 아마도 희진의 고통을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비에 젖은 채로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미자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무 궁금했어요.

   
▲ ⓒ김용식기자


영화에서 그려내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 공감이 갔던 장면이 있었나요?

이: 저는 가해자 학생 아버지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 슬펐어요. 자식의 잘못에 대해 통감하고 화내기는커녕 학교나 경찰과 합의를 보는 게 먼저잖아요. ‘저러면 안되는데’ 하고 보면서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가더라구요. 만약 내가 저 입장이었어도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솔직히 부모 입장에서 손 놓고 있다가 자식을 감옥에 보낼 리는 없잖아요.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구요.
박: 영화 자체가 그냥 우리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더라구요. 어느 한 부분을 딱히 집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모든 장면이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았어요.

   
▲ ⓒ김용식기자


감독이 영화를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사회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요?

박: 무관심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서로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미자의 마음이 이해가 갔어요. 자신의 목적만을 생각하는, 미자의 이야기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 그려지잖아요.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매 장면이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듯 했어요.
이: 저는 무관심을 보여줌으로써 소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속에서 미자 역시 ‘딸과 친구처럼 지낸다’고 말하면서도 손자 얘기를 결국 딸에게 하지 않잖아요. 이런 이중적인 모습 등을 통해, 소통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