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허리를 구부정하게 한 청소부 아줌마들만이 교정을 쓸고 있었다. 우리가 쓸데없이 몰려다니던 발자국들을, 아무렇게나 토해놓은 오물들을 그녀들은 말없이 지워주고 있었다. 마치 우리에게 부끄러운 아침을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듯이. 나는 그녀들을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변명하고 싶었다. 우린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구요. 야망을 품을 수도 없었다구요…” - 김한길. 대학일기 중

 

 

4선 의원, 드라마 같은 인생사, 아메리칸 드림, 배우 최명길의 남편, 베스트셀러 작가 등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다. 혹자는 김한길 동문을 단순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만 말하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가 집필한 ‘대학일기’와 ‘병정일기’, ‘미국일기’등을 읽어본다면 그를 단순히 운만 좋았던 사람으로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건대신문> 1280호에서는 우리대학 정치외교학과 71학번 선배, 국회의원 김한길의 청춘시절을 만나봤다.

 

중앙정보부의 관심과 시선을 받았던 청춘시절.

 

김한길 동문은 1971년도, 우리대학에 입학했다. 김한길 동문의 아버지는 1971년 대선에 출마했던 ‘故당산 김철 선생’이다. 당시는 유신정권시절이었고 김철 선생은 유일의 혁신정당이었던 통일사회당 당수였다. 자연스럽게 김 동문은 중앙정보부의 요주인물이 됐고 어딜가든지 자신을 사찰하던 중앙정보부 직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당시는 엄혹했던 유신 시대였어요. 캠퍼스는 독재에 항거하고 있었고 이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기뻐도 크게 웃을 수 없었고, 또 슬퍼도 크게 울 수 없었죠.”

심지어 전공과목 교수들에게까지 압박이 있어 김 동문은 ‘학생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학교 출입까지 통제받고 있었다. 그는 “수업에 나가지 않아야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며 “꿈은커녕 취업조차 생각하기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마음 놓고 숨 쉴 공간조차 찾기 어려웠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정도였다고 한다.

김 동문은 군에 입대하고 4개월 동안 쓴 에세이, ‘병정일기’를 문학사상을 통해 발표했다. 김 동문은 ‘병정일기’에 대해 “작가 김한길을 가능케 한 출발이었던 동시에 청춘 김한길을 좌절케 한 작품”이라 평했다. 병정일기의 내용은 김 동문이 군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들을 일기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당시 병정일기는 숱한 화제를 낳아 김 동문은 ‘병정일기’를 통해 여기저기서 글 청탁을 받기도 하고 금전적 수입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그 글이 문제가 되었다. ‘군의 기밀을 누설하고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혐의로 결국 김 동문은 중앙정보부에서 호되게 매를 맞고 한국을 떠나야 했다. “날 작가로서 유명하게 만들어줬으나 결국 이 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됐으니 병정일기는 내 인생의 모순”이라고 회상했다. 김 동문은 제대 후 그의 두 번째 일기인 ‘대학일기’를 발표했다. 이 일기는 전역 후 복학했을 당시의 그의 대학생활을 다룬 일기다. 김 동문은 대학일기에서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것 까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해야 할 일조차 없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라고 말하며 그의 처지를 묘사했다. 결국 그는 80년이 되어서야 졸업을 하고 ‘병정일기’ 덕분에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가게 됐다.

김 동문은 미국으로 건너가 주유소, 햄버거 가게 아르바이트로 험난한 미국 정착을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일을 하면서 잠은 하루에 서너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동문은 계속해서 일기를 써왔다. 그는 “대학 다닐 때부터 글을 써왔다”며 “그것 외에는 허락된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일이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이 되었고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빈민가에서 일하던 그는 후에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가 됐고, 중앙일보 미주지사 지사장을 역임하는 등 성공적으로 미국에 정착한 사람이란 평가를 들었다. 1987년, 귀국한 그는 방송위원회 활동과 동아일보 <김한길의 세상읽기>, MBC <김한길과 사람들>코너를 진행했고 그가 집필한 <여자의 남자>는 3백만부가 넘게 팔려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후 김 동문은 1996년 초, 정계에 입문했고 현재에 이르렀다.

 

 

김한길의 일침 “소중한 것을 함부로 내던지지 말 것”

 

김 동문은 이번 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전까지 다른 대학에서 매 주 강의를 하면서 20대 청년들이 취업이나 등록금 같은 여러 문제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며 청춘의 고민이란 시대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 동문은 그런 고민들을 당차게 헤쳐나가는 것을 주문했다.

“혹자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하지만 위로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어떠한 어려움이건 우리 젊은이들 스스로가 헤쳐 가야 한다. 상황이 어렵다고 주저앉는다면 절대로 그 상황은 스스로 좋아지지 않고 후배에게까지 남기기 때문에 답답한 현실에 당당히 맞서길 바란다.”

김 동문은 인생 선배로서 ‘어른이 돼서 인생 항해에 나설 때, 우리는 사랑, 우정, 정의, 평화, 자유, 등 소중한 것들을 잔뜩 배에 싣지만, 풍랑을 만나면 하나씩 집어던진다. 목적지에 다 와서 보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가 일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해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 가치에 대해 설명했다. “한 번 던진 소중한 가치들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 이들을 무사히 싣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부른다. 후배들이 소중한 것들을 모두 지켜 내는 성공한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김한길이 말하는 인생의 힌트

 

김 동문은 젊은 시절,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다독(多讀)하고 여러 사람들과 책을 놓고 토론 해볼 것을 권했다. 그는 “홀로 책 속에 있는 것은 독선과 아집에 있는 것이고 반대로 홀로 책 속에 없다는 것은 인생의 지혜를 얻지 못하도록 만든다”며 단순한 1차원적 독서가 아닌 하나의 책을 매개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권했다.

또 김 동문은 목표 없이, 혹은 이 목표가 자신이 원하는 것과 부합하는지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계속해서 부딪히며 노력해볼 것을 주문했다. 그는 “인생에는 헛수고도 공짜도 없으니 계속해서 노력하면서 부딪혀 볼 것”이라며 “노력도 없이 무엇가가 공짜로 만들어지지 않고, 당장은 시간 낭비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그 노력이 길게 보면 결국 성공하는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고 밝혔다. 또 “청춘이라는 이름 하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실수 할 수 있다는 자유”라며 “머뭇대지 말고 자꾸 도전해보고 그 과정에서 생긴 좌절마저도 인생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진정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순전히 자기 자신인데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에 빗대어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며 “특히 자신의 먹고사는 것만 바라보는 것에 소모한다면 삶의 격은 도저히 나아질 수 없으니 한번 사는 인생, 삶의 격을 높이며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동문으로써 김한길의 목표

김 동문은 “15대 초선 국회의원 시절엔 우리 학교 동문이 한 명도 없어 굉장히 외로웠다”며 “정치에서는 학맥도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손해도 많이 봤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번 이번 19대 국회에서는 대학원 동문 4명을 포함 우리대학 동문이 11명에 이른다. 김 동문은 현재 ‘국회 건우회’라는 건대 출신 국회의원, 보좌진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다. 김 동문은 “비단 정치뿐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동문들과 교류하고 서로 상생할 수 있게 우리대학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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