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신문>에서는 학내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 개진을 위해 매 호 여론면에 200자 원고지 6~7매 분량의 학우ㆍ원우ㆍ동문기고를 싣고 있습니다.”

<건대신문> 지면의 후반부를 담당하고 있는 광장면에는 교수기고인 ‘홍예교’와 학우기고인 ‘청심대’가 마련돼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기고를 구하러 다녔다. 주변의 지인에게 낚시대를 치고 미끼로 원고료를 던진다. 건대신문 페이스북에 기고를 구한다는 내용의 글을 게시하고 기다리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약 500여명 정도에게 ‘도달’한다. 기다려도 오는 기고가 없는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카톡 목록을 한번 훑는다.

요즘에는 ‘기고’가 무엇인가에 대해 혼란이 온다. 앞서 말한대로 기고는 ‘학내구성원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또 그런 생생한 의견을 우리대학 구성원들과 공유하기 위한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어느 새 내게 기고는 주변 사람을 ‘뒤져서’ 부탁해 처리해야 하는 일에 가까워지려 한다. 정상적으로 기고를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 늘 보내는 사람이 보내고, 친구에게 부탁해서, 교양과목에서 만난 학우에게 부탁해서 학우기고를 ‘해결’한다. 그러다보니 기고는 건대신문 주변 인물들로 채워진다. 다양한 의견 개진은 커녕 한정적 의견일 수 밖에 없다.

언제부터 기고는 드물게 오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기고가 많았던 적이 있기나 한 것일까? 5년 전 학생기자였던 선배는 “‘당연히’ 그 때도 기고를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현재 그의 또래가 4학년 정도라고 가정해보면 우리대학을 다니는 모든 학년이 거의 기고를 보내지 않는 것이다. 경이로울 지경의 참여도다.

오노 요코는 존 레논의 연인으로 유명한 일본의 여성 작가다. 오노 요코의 작업은 관람자의 ‘참여’를 유도하며 참여가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는 작업이다.그녀의 행위예술작업인 ‘cut piece(1964)’에서 그녀는 자신이 알몸이 될 때까지 관객들이 옷을 잘라내게 한다. 또 ‘yes paining(1966)’이라는 작품에서 관객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지만 천장에 있는 ‘yes’라는 자그마한 글자를 볼 수 있다. 두 작업 모두 관객들의 참여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여가 모든 역사를 이룬다.

사실 기고가 오지 않는다는 실토는 <건대신문>을 난감하게 만드는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 인기 없어요”, “관심도 못 받는답니다”라고 털어놓는 것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학우들도 난감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대학사회에 관심 없어요”, “내 성적이나 챙길래”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부끄러워 했을 때는 여러분도 부끄러워 하게 된다. 기고가 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대학언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라 해도 나는 기꺼이 부끄러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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