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항쟁은 사상 초유의 구속 사태로 끝이 났다. 1,265명의 구속자, 23억이 넘는 피해 복구액을 남겼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도 건물들은 골조만 남아있었고 학생들은 검은 리본을 달고 있었다. 1986년의 학생운동은 건대항쟁의 이러한 결말로 인해 사그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사태가 끝난 후 학생들은 멈추지 않고 반성과 방향 개선을 시작했다.

“85~86년에 걸쳐 광범위하게 지적되었던 문제 중 하나는 학생기구 임원들의 노령화 현상에 대한 것이었던 바 이 문제로 인해 대중적 정치투쟁의 과감하지 못한 전개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건대항쟁에 참여했던 고 최영묵 동문의 글이다. 그들은 운동이 소수 대학에 머물렀던 점, 대중과 함께 모이지 못했다는 점을 돌아보고 개선을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이들이 학생사회로 나왔다는 것이다.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지를 얻기 위해 정치정세를 감안하고, 국민들이 포용할 수 있는 요구를 내세우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논리를 정리했다.

각 대학의 학생들은 이를 바탕으로 다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6월 민주 항쟁에서 학생운동은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민주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첫걸음이 된 것이다.

우리는 건대항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성신의 예술제는 건대항쟁을 기리기 위해 10.28과 비슷한 시기에 개최된다. 여러 단체들이 기념사업을 열고 언론은 당사자 인터뷰를 진행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10.28의 색체는 옅어져만 간다. 건대항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점차 잊어가고 있다. 건대항쟁은 단순히 학생운동을 하다가 최다 구속자를 기록한 한 순간의 사건이 아니다. 건대항쟁은 민주화 운동으로 가는 하나의 톱니바퀴였고, 결국 민주주의 사회를 이끌어냈다. 1987년의 박종철 군처럼, 이한열 열사처럼 눈에 띄는 전환점이 아니었을지라도 건대항쟁은 학생운동의 큰 의의가 있는 사건이다. 1986년의 선배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고 무엇을 지켰는지 돌아봐야 한다.

경영대 근처 10.28 건대항쟁 기림상에 새겨진 문구로 끝마친다.

‘10·28 건대항쟁은 19861028일 전국 26개 대학 2천여 명의 애국청년·학생들이 이곳 장안벌에 모여 자주·민주·통일의 가치를 높이 들고 사흘 밤낮 동안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고 투쟁한 학생운동의 기념비적 사건이다. 10·28 건대항쟁의 정신을 계승하여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염원으로 민족건대 청년학도와 동문선배들의 작은 정성을 모아 이 상을 건립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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