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 전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신복룡 전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1980년대의 풍경

엄혹하던 군정 시절, 건국대학교는 공산 폭동의 대학이라는 인식을 강제로 주입 당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대학생들이 비록 마실 줄 모르는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토할망정,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저들이 왜 저렇게 쫓겨나며 죽어야 하나?” “저들이 왜 저렇게 힘없이 빼앗겨야 하나?” 하는 통한(痛恨)과 저들을 위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내가 저들과 함께 있으며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한 자괴감과 무력감이 그 바닥에 잠재돼 있었다. 그들은 철딱서니 없는 빨갱이가 아니었다.

시위 학생들은 탐욕스러운 자본가와 부패한 정치인들이 보지 못했거나 외면한 음지와 습지를 보고 경험한 무리였다. 그들은 열악한 노동 현장에 위장(僞裝) 취업하는 자학(自虐)과 학습 속에 나름의 시좌(視座)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만난 학생들 가운데에는 그런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기성세대보다 더 조국과 민중의 미래를 고민하고 가슴 아파하며, 혼자서 또는 속으로 울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이 지각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1980년대는 그동안 고도성장 속에서 과음하고 폭식한 쓰레기 음식”(junk food)을 토해버리고 싶고, 또 토해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복부 불쾌감이 심각했던 배설의 시대였다. 거기에 소외와 지역 박해와 분배 격차 등,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와 같은 시대였다. 그 시대를 이끌던 학생 지하 조직은 애학투련이었는데, 그들의 노선은 (1) 통일에 대한 열망, (2) 반미, (3)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날의 기억

그날따라 날씨가 음산하며, 진눈깨비가 나르고 있었다. 10시가 되자 갑자기 캠퍼스가 가득 찬 느낌이었는데, 누가 학생이고, 누가 외부 시위대이고, 누가 국화전시회의 관람객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경찰은 분명히 시위의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출입을 통제하지 않았다. 13:00 무렵에 전국 29개 대학 1,500명이 본관 앞 광장에 모였다.

시위대는 식순에 따라 개회사, 묵념, 애국가, 의장단 소개, 경과보고, 발족선언문 낭독, 신민당에 보내는 서한 낭독, 반공이데올로기 분쇄 투쟁선언문 낭독, 화형식, 구국 행진을 시작했다. 15:20 미국 레이건(Ronald W. Reagan)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 康弘) 일본 수상, 릴리(James R. Lilley) 주한 미국 대사의 화형식과 함께 구국 행진을 선포하는 순간 경찰이 광장에 진입했다.

16:00부터 투석전이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4층 홍보실에 지휘 본부를 설치했다. 캠퍼스 외곽의 담장 밖에도 경찰이 포위했다. 학생들에게는 애초부터 농성의 뜻은 없었다. 애당초 농성을 계획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허술한 복장으로서도 알 수 있었다. 당국은 이곳에 농성 중인 학생들을 완전히 체포할 수 있다면 전국 대학의 좌파 학생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4시가 넘었을까? 5층 연구실에서 바라보니 경찰은 토끼몰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했다. 투석전이 벌어졌음에도 경찰은 시위대를 체포하려는 것이 아니라 건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것은 독살 작전이었다. 독살이라 함은 해안가 어부들이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큰 해안에서 입구가 바다 쪽을 향하도록 오메가(Ω) 모양으로 돌을 쌓아놓고, 만조가 되어 고기도 함께 들어오면 썰물 때 그 입구를 어망으로 막아 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첫날인 1028일 밤에 독살 작전으로 건물로 쫓겨 들어간 학생은 본관 450, 사회과학관 400, 중앙도서관 50, 교양학관 80, 모두 1,130명이었다. 밤이 되니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3일 밤, 3일 낮 동안 최저 기온이 영하 0.5도라 하지만 첫서리가 내린 둘째 날부터의 야간 체감 기온은 영하 5도를 밑도는 것 같았다. 가을 복장 차림의 학생들은 폐지를 태우고, 경찰은 캠퍼스의 나무 걸상을 태워 체온을 유지했다.

1030일부터 4대 방송 텔레비전에는 느닷없이 건설부장관 이규호(李圭孝)가 출연하여 북한이 88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남한을 물바다로 만들고자 금강산 댐을 건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와 함께, 북한이 이를 의도적으로 폭파해 수공(水攻)을 할 경우에 서울이 잠기고 3·1빌딩 상층부까지 물에 잠기는 시뮬레이션을 방영했다. 댐 폭파 장면은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 나바론 요새(The Guns of Navarone, 1977)의 폭파 장면을 캡처한 것이었다.

넷째 날인 1031일 아침 9:00부터 헬리콥터를 동원한 황소 30” 작전이 진행되었다. 10:30에 사회과학관을 마지막으로 진압 작전이 완료됐다. 소요된 시간은 90분이었다. 백골단에 끌려 나오는 학생들의 모습은 굴비 두름 같았다. 불에 그슬린 얼굴은 새까매, 참새구이 같았다. 손은 심한 화상을 입은 채 앞선 학생의 허리춤을 잡고, 머리를 그의 엉덩이에 박은 채 끌려 나왔다. 옷은 남루한 가을 외출복이었다. 교수들은 가로수에 얼굴을 묻고 통곡했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들이 남긴 유산

경찰 발표에 따르면, 당일 1,268명 연행, 추가 인원을 포함해 1,525명 연행됐는데, 그 가운데 일반인이 3명이었고, 여학생이 514명이었다. 부상 학생은 52, 경찰 169, 소방관 2명으로 대부분이 화상을 입었다. 연행된 학생들 가운데 최종적으로 1,274명에게 구속영장이 신청되고, 그 가운데 다시 907명의 구속이 집행됐다.

건대항쟁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건대항쟁은 시위에 참여했던 20대 청년의 인생에 가장 뚜렷하게 각인된 경험으로, 나라의 민주화와 자주화, 그리고 조국 통일에 대한 소중한 기여로 추억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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