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건대항쟁 속‘사람들’의 이야기

198610, 우리 대학 캠퍼스는 항쟁의 공간이었다. 민주화를 외치는 목소리로 가득했던 공간. 35년이 지난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공간의 1986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건대신문은 10.28 건대항쟁을 기억하고 그 의의를 재조명하고자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건대항쟁 속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상희 교수
한상희 교수

1986115, 부산산업대학교(현 경성대학교) 교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대학생 한 명이 몸에 불을 지르고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는 투신하며 흩뿌린 두 장의 유서 <건국대 농성사건에 즈음하여><산대 학우에게>를 통해 건대항쟁의 진상규명과 현 시국에 대한 모교 학생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부산산업대학교는 훗날 이어지는 민주항쟁의 최선봉에 서게 됐다. 그의 이름은 진성일, 진성일 열사는 부산산업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 학생이었다. 당시 같은 부산산업대학교에서 법정대학 법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분신 당시 진 열사의 신원확인에 주된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우리 대학 법학전문대학원의 한상희 교수다. <건대신문>은 한상희 교수와 함께 진성일 열사의 마지막 순간을 복기하고, 건대항쟁의 의의를 되짚어본다.

건대항쟁 진상규명을 주장한 진성일 열사의 분신 당시, 기억하는 그 날의 모습을 들려주세요.

당시 저는 그 학교에 부임한 지 4학기쯤 됐습니다. 중간고사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어요. 제 연구실은 5층이었고, 학교 전경이 다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연구실에서 학생 면담을 막 마치고 학교 전경을 등진 채 책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요. 그래서 돌아봤더니 그 순간 검은 연기가 나면서 무언가 떨어졌죠. 처음에는 단순히 불이나 사고로 생각했는데, 조금 있다가 분신이다하고 사방이 소란스러워졌어요. 그래서 분신 사건임을 알았죠. 문제는 신원확인이었습니다. 평소 학생회나 어떤 조직에서 (시국 관련) 활동을 하던 사람이 활동의 일환으로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신원이 바로 특정되는데, 진성일 열사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어느 과일 것이다하고 막연한 이야기가 오갔을 뿐이었죠. 그런데 그 와중에 누군가 행정학과 학생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당시 제 과목이 전공필수였기 때문에 행정학과 학생이라면 무조건 듣게 돼 있었죠. 투신할 때 진 열사가 뿌린 유서가 있었는데, 제가 그 당시 필적에 관심이 조금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험지 답안지와 유서를 대조했습니다. 그 결과 필적이 일치하는 학생이 나와서 행정학과 교수와 법정대 학장, 대학본부에 보고를 했고 그 과정에서 신원이 확정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경찰보다 신원확인을 먼저 하신 것인가요?

아마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 사건의 경우 보통은 경찰이 정보를 갖고 있기 마련인데, 그 당시에는 경찰 측도 분신 사건이 벌어지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요. 사건 직후에는 상당히 정보가 산만했습니다. 그 시대라면 보통 그런 일이 일어나자마자 무슨 과 누구인지가 특정되고, 바로 학과와 단과대의 교수회의가 소집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진 열사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복학생으로 기억합니다. 활발하게 질문을 하는 학생이라기보다는 조용한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50~60명 가까운 학생을 강의하기도 했고, 워낙 조용한 학생이라 그런지 뚜렷하게 기억에 남진 않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성적인 편이었다고도 들었습니다. (신원을 확인했던) 중간고사 답안지는 꽤 점수를 잘 받았던 것 같습니다.

교수님에게 건대항쟁과 진성일 열사 분신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갖나요?

진성일 열사 사건을 마주했던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진 열사의 분신 이유가 건국대에서는 저런 항쟁이 벌어지는데 우린 왜 축제만 하고 있느냐는 항의였습니다. 내가 학생들을 잘못 가르쳤나? 학생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과연 뭔가 하고 쓸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시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친한 사람도 몇 없었고, 교수님들도 대개 시국에 대해 멍한 상태로 있다 보니 가끔 대학 동기나 고교 동기와 이야기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대학교 시절에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 선배는 없었고, 동기가 10, 후배가 2명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내내 함께 하는 조직이 없었던 셈입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진 열사 분신 이후에 당시 부산산업대 입사 동기 교수들을 중심으로 테니스를 친다는 명분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전교조 가입과 교수협의회 운동 등 학내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두고 활동했었죠. 어떻게 보면 제 삶 전반에 있어서 건대항쟁과 진성일 열사의 분신이 마음속 큰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박사학위도 받지 않은 채 이른 나이에 교수가 되다 보니 교수사회에 어찌 적응할지 신경 쓰는 일이 우선이라 주변을 돌아보지도 못했고, 돌아보더라도 혼자 고민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러나 건대항쟁과 진 열사의 분신이 제게 앉아만 있지 말고 행동하라는 각오가 됐습니다.

교수로서 바라보는 건대항쟁에 대한 견해는 어떤가요?

건대항쟁이 일어났던 시기는 5공화국이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시기, 그래서 집권 세력이 정권 재창출에 혈안이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 지방에 있어서 건대항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언론에서는 무더기 구속 정도만 다뤄졌죠. 건국대에서 사람들이 모여 항쟁을 하고, (그 결과) 수많은 학생이 잡혀가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였습니다.

저는 건대항쟁과 진성일 열사의 분신이 있었기에 876월 항쟁이 (전국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전까지 지방에서는 학생운동이 활성화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학생회는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에 무관심했죠. 그런데 진성일 열사 분신 이후로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부산의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학생회가 운동권이 아니었던 학교에서 자발적인 학생운동이 일어난 겁니다. 진 열사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이 행정학과 학생들을 주축으로 이뤄지고, 교수들이 여기 결합했습니다. 제가 경찰서 불려간 것만 해도 하루 이틀이 아니죠. (웃음)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876월 항쟁을 향해 나아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재의 교수님 시점에서 과거 건대항쟁 참여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그리고 현재의 건국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당시 정권의 폭력성에 대한 반발,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6월 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이후 7~9월에는 농민과 노동자 항쟁이 이어지는데, 6월 항쟁으로 정치권이 개헌국면에 몰두하면서 이들은 소외됐습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됐으나 여전히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민주화되지 못했죠. 신군부와 자유주의 세력의 타협 속에 이들이 소외된 겁니다.

건대항쟁 당시 목소리는 이 나라의 주인이 우리라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의 우리는 특정 세대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당시의 여러 민주항쟁에 참여한 이들은 이제 기성세대가 됐으니, 이제는 학생들이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에게 눈을 돌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양극화된 사회를 조정하고 완화하는 역할이 필요해 보입니다.

6월 항쟁 당시만 하더라도 모든 학생과 시민들의 함성은 군정 종식과 직선제 쟁취로 하나 됐지만, 이제 그런 구호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각 분야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기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 대학의 학생들이 건대항쟁의 뜻을 이어받으려면, 그런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어깨를 빌려주고 함께 목소리 내주는 의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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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제를 후회하고 내일을 기대하지만, 언제나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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