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집 앞은 한산했다. 영선과 같이 왔을 때보다 황량한 분위기가 더 강해진 것 같다고, 연수가 거리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연수는 그때 영선의 손에 들려있던 빨간색 천 가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기름집을 가장 먼저 들르고, 이후엔 고작 다섯 발자국 거리의 채소가게에서 무 두 개를 더 샀을 뿐, 이외에 더 구매한 것은 없었다. 무의 크기를 과하리만큼 크게 가늠하더라도, 장바구니의 절반에도 못 찰 내용물이었다. 그런데도 연수의 기억 속 영선은 집을 나서기 전, 모처럼의 시장 나들이라고 말하며, 그 가방을 손에 꼭 쥐었다.

짠 지 얼마 안 된 거 있는데 그걸로 줄게요.”

연수가 들기름 한 병을 내밀었을 때, 여자는 그것을 받아 한쪽으로 치워놓고는, 가게 안쪽의 창고로 들어갔다. 연수는 지갑 안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다가, 예상치 못한 여자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이것까지 주세요. 두 병해서 얼마예요?”

창고에서 똑같은 초록빛 유리병을 들고 온 여자는, 연수의 말을 듣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들기름은 빨리 먹어야 하는데.”

?”

나름의 선심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행동에 여자가 오히려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연수는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들기름이나 참기름이나 사놓고 마냥 냉장고에 두는 사람들 많은데, 오히려 기름이라는 건 생각보다 빨리 먹어야 해요.”

아는 사람한테 한 병 주려고요.”

여자는 자기 앞에 놓인 참기름 두 병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연수는 무의식적으로 여자를 따라 앞에 놓인 두 병을 바라보다가, 곧 주인의 의도를 파악하고 재빨리 대답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어딘가 변명하는 모양새였다고, 연수는 말을 마치자마자 생각했다.

두 개해서 삼만 팔천 원이에요.”

여자는 연수의 말을 듣고 나무 선반 옆에 매달린 검정 봉투 다발에서 봉투 하나를 쥐어뜯었다. 그때야 비로소 연수는 계속 손에 들고 있던 지폐 두 장을 여자에게 내밀 수 있었다.

머리 스타일이 아주 멋져요. 요즘 말로 아주 분위기가 있어.”

감사합니다.”

들기름 두 병이 담긴 봉투를 건네면서 여자는 연수의 머리를 칭찬했다. 연수는 어쩐지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히피 파마 전문 미용실까지 찾아 가 내심 호기롭게 바꾼 머리 스타일이었다. 정작 파마를 한 지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수는 본인의 머리가 어색했다.

이런 스타일을 뭐라고 하더라? 요즘은 머리 볶는 것도 아주 이름이 많데.”

그러긴 하는데 그래봤자 파마는 파마인걸요.”

젊은 사람들 하는 파마인지 그냥 파마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 아주 느낌 있어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 어울려.”

이어지는 여자의 칭찬에 연수는 대답으로 감사하다는 말만 또다시 되풀이했지만, 속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당장 며칠 전 만난 연수의 엄마만 하더라도, 그녀를 보자마자 오랜만이라는 인사도 없이 연수의 머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최악이라고 평했다. 그때 연수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몇 번이나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들었다고 대답했지만, 그녀의 엄마는 가족의 솔직함은 다르다며 연수의 말을 일축했다.

주위 사람 몇몇은 이상하다고 하더라고요.”

여자는 거스름돈을 세던 손을 잠시 멈추고 연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요? 내가 보기엔 엄청 멋진데. 자기는 지금 머리 맘에 들죠?”

? . . 저는 뭐

입을 열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려 그사이 짧은 정적이 흐르고 말았지만, 연수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자는 연수의 대답을 듣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마저 거스름돈을 세었다. 여자의 손놀림이 마치 영화 속 빨리 감기 장면 같다고 연수는 생각했다. 몇 초 되지 않아 여자는 지폐 몇 장을 연수에게 내밀었다.

그럼 됐어. 남들이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자기 머리는 결국 자기 맘에 들면 끝난 거예요.”

연수가 거스름돈을 받아 지갑 한쪽에 잘 펴서 넣고 지갑을 닫아 가방에 담았을 때, 여자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는 조금 작았지만, 대상이 없어도 누군가를 향해 선언하는 듯한 느낌이 어딘가 영선의 말투와 비슷하다고 연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영선은 소주보다 맥주를, 그리고 맥주보다 위스키를 좋아했다. 밖에서는 술을 먹지 않았지만, 집에서는 적어도 사흘에 한 번 술을 마셨다. 연수와 영선의 첫 만남도 술자리였다. 연수의 기억 속 그때의 영선은 술을 혐오하는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잔에 담긴 술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서 영선에게 모종의 강요나 부추김은 없었다. 그런데도 영선은 분명 못마땅한 표정으로 술잔을 바라보았다.

술이 엄청 많네요?”

그래서 연수는 영선의 집에 들어가 거실을 둘러보며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거실 한쪽 커다란 나무 진열장이 모조리 술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크기는 제각각이었으나 족히 오십 개는 될 법했다. 술병들은 마치 피란민 무리처럼 옹기종기 모여 더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진열장의 모든 층을 가득 채웠다.

집에서 술 마시는 거 좋아하거든.”

언니가요? 언니가? 언니 술 좋아해요?”

나 뭐 사기라도 친 거니? 왜 이리 놀래.”

연수에게 영선이 직접 술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연수는 잠깐 스쳐 지나갔던 영선의 표정을 목격한 이후부터 잠정적으로 그녀가 술을 싫어하리라 생각했다.

얘는 술 끊으면 로또 1등 당첨된다고 해도 거절할 애야.”

건호는 현관에서 웅크려 앉아 신발을 정리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등이라고 하면…… 아 좀 고민되기는 하는데, 그래도 결국 못 끊고 몰래 마실 거 같기는 하다. 근데 왜? 뭐 있어? 나 까먹은 거 같은데 알려주라. 뭔데?”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술자리에서도 잘 안 드시고 그러길래……

나 밖에서는 거의 안 마셔. 손도 안 대. 그래서 술자리에서는 이 잔 들고 집으로 얼른 튀고 싶다 막 그런다 속으로. 좋아하는 술이면 진짜 무의식적으로 발도 동동 굴러.”

영선은 진열장 앞으로 손을 뻗어 안내했다. 그리고 연수에게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 말했다. 연수는 고민 끝에 회색 라벨지가 붙은 병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가리켰다. 영선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말하며 들뜬 손짓으로 그것을 병들 사이에서 들어 조심스럽게 품으로 가져갔다. 술병 속 찰랑거리는 소리가 연수에 귀에 희미하게 들렸다.

 

건호의 전화가 울렸을 때 연수는 향을 피우고 있었다. 며칠 전 대형 서점을 들렀을 때 구매한 것이었다. 연수가 인터넷으로 제품을 검색해보자 영어로는 인센스(incense)라고 했다.

제사 때나 쓰는 거 아닌가.’

영어로는 낯선 이름이었지만 연수는 사용법을 읽으며 곧바로 향을 떠올렸다. 막상 그렇게 생각하니 사용하기가 조금 꺼려졌지만, 얇은 막대에서 풍기는 향을 한두 번 맡고는 이내 피우리라 결심했다. 인터넷에서는 전용 받침대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연수는 잘 쓰지 않는 사각형 사기그릇 위에 작은 유리병을 놓고, 그 안에 꽂으면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라이터로 향에 불을 붙이고 나서, 십 초 후 숨을 후 불어 불을 끈 뒤 유리병에 꽂았다. 불을 끈 후에도 막대는 연기를 내며 아주 조금씩 타들어 갔다. 건호의 전화는 그 길이가 삼 분의 일 정도에 이르렀을 때 울렸다.

여보세요.”

집이니?”

. 그런데요.”

연수는 건호의 전화가 십중팔구 영선과 관련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술을 먹다가 궁금한 것이 생겨서 영선이 건호에게 얼른 전화해보라고 부추겼겠거니 짐작하며, 스툴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을 그들을 직접 상상해보기까지 했다. 그들이 먹고 있을 안주는 아마 땅콩이나 아몬드 둘 중 하나이리라 생각했다. 둘 중에 뭐든 반드시 연청색 종지에 담겨있을 것이라고 연수가 추측했을 때. 전화기에서 건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영선이가 죽었어. 와줄 수 있을까?”

 

현관 비밀번호는 영선의 집에서 연수가 두 번째로 술을 마셨을 때, 영선이 손가락을 펴가면서 연수에게 알려 주었다. 연수는 영선의 얇은 손가락을 떠올리면서 차가운 검은색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노을빛이 창문을 지나 거실에 반 정도 들어차 있었다.

언니 추우시면 저기 창문 닫을까요? 옷도 얇게 입으셨는데. 제가 지금 닫고 올게요.”

나는 원래 이렇게 얇게 옷 입고 살짝 찬 바람 솔솔 통하는 데에서 술 먹는 게 좋아. 너 춥니? 너 추운 거면 내가 닫으러 갈게. 앉아 있어. 잠깐만.”

아뇨. 언니 추우실까 봐 물어본 거였어요. 저도 바람 살짝 통하고 상쾌하니 좋아요. 별로 춥지도 않고요.”

저쪽 거실 창문 빡빡하니 잘 안 움직여서 어떡하나 싶었는데, 몇 달 전에 건호가 생일 선물로 폴딩 도어 공사해줬다? 쟤한테 받은 선물 중에 최고야. 열기도 편하고 닫기도 편하고.”

이미 공사 견적까지 뽑아놨더만.”

건호가 무덤덤하게 말하자, 영선은 소리 내어 웃고는 스툴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돌아와 다시 스툴에 앉았을 때, 영선의 잔 안에는 얼음이 가득했다. 연수는 영선이 부엌 쪽으로 걸어갈 때, 건호가 그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지은 것을 알고 있다.

나는 특히, 좀 많이 마셔서 취기 때문에 머리도 좀 무겁고, 몇 시간이고 바람맞아서 몸도 슬슬 추울 때, 딱 그때 바로 따뜻한 이불 속으로 골인하는, 바로 그거, 진짜 너무 좋아해. 한겨울에 특히 더.”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이불속에 눈 감고 웅크리고 있으면 그때마다 겨울 진짜 좋다고 생각하는데.”

맞아. 한겨울에 찬 바람 맞을 때보다 그럴 때 오히려 겨울이구나 싶어.”

맞아요. 진짜 완전 통한다.”

연수는 그때 평소답지 않게 한껏 손뼉까지 쳐가며 서로의 공통점에 열렬히 호응했다.

쟤는 내가 한껏 찬바람 맞다가 곧바로 따듯한 곳 들어가는 거 보면 그게 떠오른대.”

어떤 거요?”

네 입으로 말해.”

영선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건호를 향해 말했다. 건호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 대답을 하지 않고, 이내 천천히 스툴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막상 또 찬바람 맞고 싶어지면 창가 쪽으로 슬그머니 걸어간단 말이야. 쟤가 나 그러는 거 보고 어느 날엔가 국수 소면 같다는 거야. 뜨거웠다가 차가웠다가 잔치국수 되고 싶냐면서.”

진짜 최악이다.”

표현과 달리 연수는 허리가 살짝 뒤로 넘어갈 정도로 격하게 웃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스툴 위에서 자세를 정비했을 때,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혀있었다.

그치? 나도 듣자마자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어떻게 그런 모습을 보고 소면을 떠올려? 근데 또 자존심 상하는 건 듣고 나서 밤에 자는데, 그 표현이 머릿속에 불쑥 떠오르더니 그때부터 너무 웃긴 거야. 그래서 갑자기 한밤중에 웃음 터졌어. 쟤는 또 영문을 모르니까 나보고 왜 그러냐고 그러고 있고.”

저 나중에 소면 먹을 때 생각날 거 같아요.”

그치. 나도 술 먹다가 따듯한 이불에 들어갈 때나, 밖에서 잔치국수 먹을 때 그때 쟤 말이 꼭 생각난다니까. 말하는 거나 단어 선택하는 거 보면 진짜 감성 안 맞는데 또 극과 극은 통한다고 오히려 은근히 맞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

영선은 그렇게 말하며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연수는 그때 영선의 표정이 막연하게 좋다고 생각하며, 건호의 등에 닿았을 그녀의 시선을 상상했다.

건호 쟤는 사실 국수도 잘 안 먹는다?”

그래요? 아까 점심엔 잘 드시지 않았어요?”

. 나도 그냥저냥 잘 먹어서 그런 줄 몰랐는데 어느 날 나랑 저녁으로 국수 먹으면서 자기는 국수 잘 안 먹는다고 그러는 거야. 면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 근데 난 진짜 국수 러버거든. 그래서 자주 해 먹기도 했고. 그래서 내가 눈이 똥그래져서 말없이 놀라고 있으니까, 정작 나랑 둘이서 먹을 때는 신기하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먹게 된대. 그래서 내가 로맨틱하기는 한데 조금 부담스럽다고, 나 때문에 먹고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하니까, 나를 좋아해서 묵묵히 먹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맛있게 먹어서 그렇다고 하는 거야. 내가 진짜 맛있게 먹어서 자기도 그거 보고 홀린 듯이 먹게 된다고. 진지한 목소리로 나한테 일 접고 당장이라도 국수 전용 먹방을 해야 한다고 그러는데,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한데 또 이후에는 웃음이 터져서

연수는 국수를 먹던 영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금세 속으로 수긍했다.

언니. 저 아까 점심에 한 국수 레시피 알려주시면 안 돼요? 저 원래 들기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언니가 해주신 건 너무 맛있게 먹었다니까요.”

어우. 열 번도 알려주지. 기름집 참기름 몫이 팔 할이지만, 뭐 내 손맛도 있으니까. 원하면 한지에다가 붓으로 써줄까?”

그렇게 말하며 영선이 붓글씨를 쓰는 시늉을 보였을 때 건호가 돌아와 스툴에 앉았다. 연수는 영선이 오른팔을 크게 휘적거리며 붓글씨를 흉내 내는 모습을 보며 미소짓다가, 그것을 바라보는 건호의 무덤덤한 표정을 보고는 그때부터 말 그대로 폭소했다.

 

영선은 건설 현장 옆을 지나가다가, 타워 크레인이 놓친 철근에 깔려 사망했다. 이른 아침이었으며, 공사 인부도 몇 없었다. 건설 현장은 임시 외벽으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철근은 그것을 넘어 인도에 떨어졌다. 건호가 일 때문에 서울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장으로 경찰과 병원 구급차가 도착했으며, 영선의 얇은 검정 카디건 안에 있는 지갑,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담긴 주민등록증을 통해 신원이 확인되었다. 경찰은 곧바로 영선의 법적 연고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사고 당일을 기점으로 건호와 영선은 126개월을 같은 거주지에서 살았으나, 경찰의 연락은 세 살 된 영선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난 그녀의 엄마에게만 취해졌다. 건호가 영선의 엄마에게 연락을 받아 장례식에 도착했을 때는 사고가 일어난 지 여섯 시간이 지나있었다.

장례식에서 건호가 정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돕는차원에 머물렀다. 경찰과 건설회사 관계자, 관계 부처 공무원들까지 다녀갔지만, 영선의 엄마는 그들과 이야기하는 자리에 건호를 대동하지 않았다. 그들이 장례식 건물 내에 따로 마련된 방에서 이야기를 나눌 동안 건호는 홀로 조문객을 맞이했다. 연수가 새벽의 고속도로를 지나쳐 장례식을 방문했을 때에도, 건호는 홀로 우두커니 서서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건호에게 어떤 말을 건네지도 않고 곧바로 영정 앞에 섰지만, 연수는 사진 속 영선의 얼굴을 보자 몸이 굳어버렸다. 절도 묵념도, 절대로 해서 안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액자에 둘린 검은 띠마저 성가셨다. 집에서 건호에게 전화를 받고 사건의 대략적인 경위까지 들었지만, 사진 앞에선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다니 정말 고마워요.”

낯선 목소리가 들려 연수가 옆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중년의 여성이 서 있었다.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짙었다.

영선이가 종종 말씀드렸던 연수예요. 영선이 어머니셔.”

건호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여성과 연수를 서로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연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치 다른 사람의 장례식장에 온 것처럼 느껴졌고, 그러자 일순간 정지되어 있었던 의식이 아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고, 뒤이어 천천히 향을 피웠다.

 

이제까지 엄마를 세 번 봤어. 아빠 죽었을 때랑 할머니 죽었을 때, 그리고 어제 건호랑 셋이서 만난 거까지 해서 세 번. 어째 다 주기가 십 년이 넘네. 그럼 다음에 만날 때는 내가 마흔이 넘는 건가?”

영선이 연수에게 전화를 걸어 일이 없으면 집으로 와줄 수 없냐고 했던 날이었다. 연수와 영선이 알고 지낸 지 정확히 86개월이 된 날이었지만, 당일에 만나자고 연락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이후엔 없었다. 연수의 집에서 영선의 집까지는 차로 40분이 걸렸으나, 연수는 영선의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코트를 어깨에 두르듯이 걸치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연수가 도착했을 때, 영선은 집 앞에 서 있었다. 오른손으로 얼음이 조금 담긴 유리잔을 들고 있었다. 영선은 연수에게 와줘서 고맙다고만 말하며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내년에 건호가 독일 일 정리하고 들어오면 혼인 신고를 하려고. 걔 생일이 봄이니까 아마 그때 즈음해서.”

너무 좋네요. 음 제가 좋다니 뭔가 웃기지만, 그래도 정말 너무 좋아요. 언니.”

연수의 표현은 건호만을 향해있지 않았다. 그저 영선과 건호 모두에게, 그리고 연수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영선은 이십 대 초반 자궁근종 수술을 했고, 그때부터 아이를 갖기 힘들어졌다. 하복부에 불쾌감이 생겨, 영선이 인터넷에 관련된 내용을 검색해보자 처음 보는 내용과 함께, 글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산부인과 진료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많았다. 이후 영선은 생의 처음으로 산부인과 진료를 받았고, 그때 의사의 입을 통해 생의 처음으로 자궁근종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다. 뭐 하나 생소하지 않은 게 없었지만, 의사의 강한 요구에 얼떨떨한 느낌으로 검사까지 받았다. 의사는 그녀에게 근종의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커서 급히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때 영선은 의사의 심각한 말투도, 근종의 크기도 다 얼떨떨했다. 당장 그다음 날에도 아르바이트 근무가 두 개 잡혀있었고, 통장에는 수술비는커녕 검사비를 치르고 나서 육만 원 조금 넘는 돈이 남아있었다.

영선은 건호와 사귄 지 이 년이 되는 날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건호가 결혼하자고 얘기하며 감색의 조그마한 상자를 내밀고 나서였다. 근종에 대한 내용과 함께, 평소와 같은 말투로 자신을 진료했던 의사가 어느 개그맨을 닮았으며, 입원실 옆자리의 할머니를 찾아온 사람들이 하도 큰 소리로 예배를 드려 정말이지 귀가 울릴 정도로 시끄러웠으나, 나중에는 어느새 자신도 그들을 따라 찬양가를 따라 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은 결혼도 혼인 신고도 하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건호가 원하든 말든 자신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건호는 얘기를 듣는 내내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얼음을 가지러 가는 영선을 향해, 올해 건강검진은 언제로 예정되어 있냐고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어보았다.

오빠는 이 사실 알아요?”

모르지. 근데 또 걔는 막상 하고 싶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 전에 미리 물어보려고. 저번에 티비 보다가 그러는데, 걔 어릴 때 이상형이 안젤리나 졸리였대. 그 말 듣는데 왠지 혼인 신고 안 해줄 거 같은데 싶더라니까. 혹시 모르니까 입술 필러라도 맞고 얘기할까? 나 그래도 턱은 좀 각졌으니까 입술만 좀 두꺼우면 아주 조금이라도 느낌 있지 않겠어?”

오빠는 정작 어디서 벌한테 쏘였냐고 할 거 같은데요.”

영선이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턱을 과시한 뒤, 이후 입술을 과장되게 부풀렸다. 연수는 건호의 무덤덤한 표정을 따라 하며 심각한 척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영선은 누구를 따라 하는지 알아챈 모양인지 소리 내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연수 네가 우리 혼인신고서 증인 되어 주면 좋겠어.”

연수는 목이 메어 열심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영선이 자신의 오른손을 연수의 왼손 위에 포갰다. 연수도 곧 자신의 오른손을 영선의 손 위에 포개었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서로의 손을 겹겹이 포개고만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구예요? 증인 두 명이잖아요.”

연수가 그렇게 말했을 때 영선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연수가 반사적으로 포개진 손들을 바라보자, 영선이 천천히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낮에 엄마랑 통화했는데, 호텔에 있다고 하더라.”

연수가 모양새가 어색해진 자신의 양손을 허벅지 위에 포개어 올려두었다.

어디 여행 가셨나 봐요?”

그런 줄 알았는데, 결혼식이래. 신랑 쪽 혼주.”

허벅지 위에 포개진 연수의 양손이 살짝 흐트러졌다. 영선은 이어서 자신과 엄마와의 만남이 그때까지 총 세 번임을 말했다. 만남의 주기가 십 년이라고 말하고 나서는 살짝 웃기까지 했다. 연수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영선의 눈꼬리는 조금도 휘어지지 않았다.

증인이야 뭐 많지. 건호 부모님도 계시고, 가끔 만나는 대학 동창들도 있고

영선은 차분한 말투로 증인이 될 만한 사람들을 손가락을 피면서 나열했다. 어떠한 장신구도 걸치지 않은 맨손이었다. 연수는 작년 생일에 영선에게 건호와 커플링을 하는 것은 어떻냐고 물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 영선은, 사귄 지 이 년째 되던 날의 일화를 연수에게 말해주었다.

건호랑 티비 보는데 어떤 케이블 채널에서 연예인 일화 같은 게 순위별로 나오고 있는 거야. 잠깐 봤는데도 별 실없는 얘기들만 나왔는데 보다 보니까 어쩐지 그래서 좋더라고. 그냥 채널 멈추고 둘이서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안젤리나 졸리 얘기가 나오더라,”

영선은 또다시 입술을 과장되게 부풀렸다. 연수는 살짝 웃고 이내 그 표정을 자신도 따라 했다. 그것을 보고 이제는 영선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영화라도 찍었나 싶었는데, 아들이 한국 대학에 진학했다는 얘기였어. 그러고 나서 캄보디아에서 입양한 얘기를 하면서, 둘이 같이 있는 파파라치 사진 몇 개가 티비에 연달아 나오는데 안젤리나 졸리 얼굴도 그렇고 아들도 그렇고 얼굴들이 너무 평화로워 보이는 거야. 멍하니 보고 있다가 왠지 나도 모르게 이상한 감정이 몰려와서, 얼른 다른 채널로 돌리려고 리모컨을 찾는데, 건호가 갑자기 그러더라고. 입양하는 거 어떻냐고, 자기는 몇 년째 생각하고 있다고. 정확히 말하면 생각만 하고 있다고 그랬어. 그냥 평소 말투로 담담하게.”

언니는 뭐라고 대답했어요?”

연수의 양손은 다시금 허벅지 위에 포개어 올려져 있었다. 두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안젤리나 졸리 예쁘다. 그냥 그렇게만 말했어. 그러고 나서 건호가 자기 어렸을 때 이상형이 안젤리나 졸리였다고 대답했고.”

 

조금 전 연수의 오른쪽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의 메신저 알림 소리가 울렸지만,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건호는 한국에 없었고, 집은 영선의 어머니에게로 넘어가 다음 달이면 철거될 예정이었기에, 적어도 오늘 이 집에 있을 사람은 연수 하나뿐이었다. 연수는 장례식장에서 얼굴을 마주했을 때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집 명의가 넘어가자마자 곧바로 철거에 들어가는 그 속도감마저 영선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첫 만남이었던 술자리 열기가 잠정적으로 끝에 달했을 때, 영선이 자리를 정리했다. 그녀는 연수가 다니던 회사의 고문 변호사였으므로, 현실적으로 자리를 마무리할 의무는 조금도 없었다. 도중에 일이 있다고 하며 바깥으로 나가더라도 누구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영선은 누군가 부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해도 다시 물었으며, 이내 거주지가 비슷한 사람들을 하나둘씩 묶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모임의 구성원 중 가장 막내에 속했던 연수가 평소에 하던 일이었고, 그때에도 해야 했을 일이었다. 연수가 영선에게 자신이 정리하겠다고 여러 번 말하였으나, 영선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술자리 정리하는 사람이 둘은 되어야겠다고 말하며 자리의 마무리를 계속했다.

집이 어디예요?”

영선이 가게에서 나오면서 말했고, 연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추위에 턱 끝이 살짝 떨렸다.

여기서 가까워요.”

어딘데요? 차 갖고 왔으니까 데려다줄게요.”

영선이 자신의 입을 지퍼로 잠그는 듯한 시늉을 보이며 손가락으로 오케이를 그렸다. 연수의 집은 그곳에서 차로 40분이 걸렸으나, 그때 연수는 아무리 그래도 영선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술자리를 기점으로 넉 달 전 연수가 보증금 문제로 집주인과 민사 분쟁까지 고려하며 원형 탈모까지 겪었을 때, 영선은 옆자리 대리에게 답답한 심경을 조금이나마 털어놓던 연수에게 다가가 자신의 연락처가 담긴 명함을 슬그머니 건네었다.

괜찮으면 나중에 연락해요.”

연수는 명함을 건네받고 나서 한동안 멍해 있었다. 대리는 영선이 사라지자마자 그녀가 회사 고문 변호사라고 말하며, 이사님을 만나고 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여전히 멍해 있는 연수에게 아무리 그래도 연락은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연수는 영선이 지나간 복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몇 주 뒤 민사 분쟁 직전의 상황에 부닥치자 고민 끝에 영선에게 연락을 취했다. 영선은 말을 더듬으며 용건을 이야기하는 연수에게 잘 연락했다고만 대답했다.

그냥 조금 걸어가면 돼요.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술 먹고 운전할 것 같아서 그래요? 나 진짜 조금도 안 먹었어요. 입 근처에도 안 댔어요.”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데려다줄게요. 금방 차 갖고 올 테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너무 얇게 입어서 추운 거 같은데, 이거라도 두르고요.”

영선은 빠른 속도로 자신의 머플러를 연수의 손에 쥐여주고는 주차장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어차피 가는 방향이네요.”

목적지를 들은 영선은 그렇게만 말했다. 연수는 곁눈질로 그녀가 운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검은색 캐시미어 코트에 도로의 불빛이 순서대로 통과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저번 일도 정말 감사했고요.”

오늘도 그때도 다 잘 되어서 다행이에요.”

거주 문제가 해결되어, 그 답례로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연수의 말에, 영선은 괜찮다고만 말하며 연수의 제안을 깔끔히 거절했다. 연수는 모종의 서운함을 느꼈지만, 이내 서운함을 느끼는 자신이 더 어이없다고 느꼈다.

원형 탈모라는 게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실은 아주 큰 고통이거든요. 나도 몇 번 겪었는데 아주 그 조그마한 게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해요. 지금은 괜찮아요?”

. 거의 다 나았어요. 변호사님 덕분이에요.”

건물 불빛이 뜸해지고, 이제는 가로등 불빛만이 영선의 코트를 통과했다. 차 안은 어느 순간부터 온기로 가득했다. 연수는 따듯함과는 반대로 자신의 머리가 살짝 무겁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입이 열렸다.

저 사실 변호사님 동경하고 있어요.”

저를요? 동경이요?”

. 설득력은 없겠지만 단순히 절 도와주셔서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흔히들 하는 능력 있다는 말에서 정작 그 능력이라는 게 뭘까 싶었거든요. 돈이나 집안의 배경, 아니면 외모나 비율 좋은 몸매인가 싶었고요. 어떨 때 보면 그 전부 같았어요. 실제로 그런 사람들 사회에서 아주 가끔이지만, 종종 봤거든요. 돈도 집안도 얼굴도 몸매도 당연한 듯 다 가진 사람들. 전에는 그런 사람들 보면서 저런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구나 싶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뭐 반발심도 없어졌고요. 결국 갖고 태어나는 거고, 저는 단순히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했어요.”

연수는 스스로가 취했다고 느끼며 그만 말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그녀의 입은 그런 의식과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근데 변호사님 만나고 나서, 단순하게 그게 아니었구나 싶었어요. 돈이나, 외모, 그런 차원의 개념이 아니고, 능력 있는 사람의 진짜 능력은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으로서 완성되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동경하게 되었고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저렇게 되고 싶다 느꼈어요.”

이미 연수의 마음은 후회로 가득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횡설수설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스스로 받은 느낌을 백 분의 일만큼도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연수가 곁눈질로 영선을 보았으나, 그녀는 말없이 앞을 보고만 있었다.

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거든요. 할머니 밑에서. 지천이 밭이었고, 뭐하려면 읍내까지 차로 가야 했어요. 할머니는 밭일하느라 바빠서 그런 데 데려다줄 사람이 없으니까, 오락거리라고 해봤자 집밖에서 할머니 기다린다고 멍때리는 것밖에 없었어요.”

차 안에서 연수의 한숨 소리가 울렸을 때, 영선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마냥 생각한 게 구름은 참 좋겠구나 싶었어요. 두둥실 날면 어디든 갈 수 있겠구나, 그러면 티비에 나온 휘황찬란한 건물들도 맘껏 가서 볼 수 있겠구나 싶었죠. 생긴 것도 푹신푹신하고 몽글몽글한 데다가 새하얬고요. 어린아이 눈엔 더없이 좋아 보였어요. 저는 맨날 땡볕에 뛰어다니고 그래서 까무잡잡했거든요.”

연수는 까무잡잡한 어린 날의 영선을 상상했다. 그러나 취기 때문에 상상하기 어려웠다.

구름이라면 할머니가 저 멀리 있다고 했던 엄마도 몇 번이든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게라도 하면 마치 구름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마냥 하늘에서 구름만 쳐다보게 되더라고요. 더위 먹은 거 아니냐고 할머니가 여름에 걱정까지 했을 정도로요. 그런데 청천벽력처럼 어느 날 학교에 가니까 하늘을 날아도 구름은 만질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큰 솜처럼 보여도 막상 실체는 손에 잡히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요. 뒤이어서 뭐 기체라거나 그런 내용을 말하는데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런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며칠 동안 충격으로 넋을 놓았죠.”

이제는 영선의 한숨 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제가 생각하는 동경은 그런 느낌 같아요. 정작 구름은 단단한 땅 위에서 맘껏 발로 뛰노는 나를 동경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신호에 걸려 영선의 검은 차가 사거리에서 멈췄다. 영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연수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랑은 다르게 사실 이제는 별이 더 좋아요. 정읍에 집을 짓고 있거든요. 시골 한 귀퉁이에 작게요. 거기 별이 정말 많아요.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예요. 아주 멀지만 그래도 별은 거기에 확실히 있어서 좋아요. 혹여나 이제는 폭발해서 뭐 없다고 하더라도, 잠깐의 빛이 나한테 닿았고요.”

연수는 묵묵히 영선의 말을 듣고만 있었지만, 정작 말이 끝나도 알 듯 말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한 게 혹시라도 맞았다면 왜 영선이 그런 말을 하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너무 안 고마워해도 돼요.”

?”

사거리의 신호가 바뀌고 영선이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연수가 살짝 큰 소리로 반문했지만, 앞으로 달려 나가는 차 소리에 묻혀버렸다.

나 밤늦게 혼자 차 끌면서 집에 가는 거 싫어하거든요. 괜히 마음도 외로워져서. 그리고 연수 씨 관련 자료도 다른 소송에서 어느 정도 써먹었어요. 결과를 말씀드리면 아주 당당히 승소했답니다. 이럴 때 흔히들 윈윈이라고 하나요?”

영선은 윈윈이라고 다시 한번 천천히 발음했다.

윈윈이라고 하시니까 말씀드리는데, 저도 사실 밤늦게 혼자 걸어가는 거 싫어해요.”

좋네요. 그것도 윈윈.”

창문 살짝만 열어도 될까요?”

그럼요. 안 그래도 조금 더웠는데 이것도 또 윈윈이네요.”

창문을 열자 틈 사이로 금세 찬 바람이 들어왔다. 연수는 창문 틈 사이로 좀 더 선명해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정읍의 별은 어떨까 상상했다. 정읍의 별을 상상했던 그때 연수의 눈빛도, 도로를 달리는 검은 차도, 그 안의 영선과 연수도, 장례를 마치고 독일로 떠난 건호도, 들기름 두 병도, 모두 정읍 하늘의 별처럼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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