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모작 중에서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은 〈흐늘흐늘한 것들〉과 〈환의 천재〉 였다. 두 작품 모두 예년에 비해 높은 수준의 통찰을 보여줬고, 정직한 문장, 주제에 접근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환의 천재〉 는 익숙한 연애담으로 시작한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두 남녀의 관계는 이들의 아랫집에 펫숍이 들어오면서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펫숍은 ‘사랑’과 ‘소유’라는 오래된 질문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때, 너를 안다고 할 때, 과연 그 언어는 누구의 것이며 무엇을 소외시키는가. 사랑의 폭력성을 적절한 비유를 통해
이거 책으로 너무 도망치는 거 아닌가?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야 하는 일을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고 소설을 읽던 중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책 읽는 것이라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제 취미란에는 독서가 빠졌습니다. 독서량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늘었는데, 마음 한구석에서 찜찜함을 느꼈던 탓인 것 같습니다. 그 독서량이 마음이 힘들 때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등 특정한 이벤트가 있을 때 더 늘었기 때문입니다.올해는 유난히 해내야 하는 것, 선택해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어딘가로 도망가고
해파리가 떠났다. 내게 익숙한 죽음은 아니다. 내가 아는 죽음은 원래의 색이 바래고 비린내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해파리는 여전히 반투명하고 비린내가 나지도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평소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죽었다고 느낀다. 사실 몇 번 상상해 본 적이 있다. 해파리가 갓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유영하는 것을 지켜보다 문득 이 해파리에게 마음을 너무 쏟고 있다는 걸 의식했을 때 그 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뼈가 있는 작은 것들은 화장을 많이 한다고들 한다. 패각이나 껍질이 있으면 화분 같은 곳에 묻었다가 속이
좋아하는 것들은 왜 이렇게 빨리 사라질까요. 아주 오래 좋아했던 가수의 신곡이 나온 걸 알면서도 들을 생각을 안 하고, 여름을 좋아했던 것도 같은데 더위에 짜증을 내고 있다는 걸 알아챌 때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어떻게 좋아했단 사실조차 잊어버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좋아했던 것들이 어떻게 더 이상 아무 감흥도 없어질 수 있고 그렇게 좋아했던 것들이 없어졌는데 저는 또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 한 채로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었을까요. 피아노를 이틀만 못 쳐도 손이 근질거릴 때가 있었는데 집에 있는 키보드엔 저도 모르는 새 먼지가 두껍게
2022년 건대 문학상 소설 부분에 응모된 작품은 총 다섯 편으로, 인상적으로 본 작품은 과 이었다. 은 일명 ‘고시원 생활 연대기’로 경제적 곤고함이 공간의 문제로 치환될 때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지, 그 위협이 개인을 어떻게 잠식시키는지를 위트 있는 문장으로 그려낸다. 서사적 활력이 있는 작품이라 일단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고시원이라는 공간과 그 활용이 이미 지난 세대의 그것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소재와 주제의 변주를 고민해보면 좋겠다. 해 아래 새로운 이야기란 없지만,
몇 번이고 고쳐업어도 헤나의 발은 땅에 질질 끌리기만 한다. 한번 내려놓으면 다시 업기까지 한참이 걸릴 걸 알면서도 초록은 바짝 힘주던 팔에 힘을 뺀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헤나가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먼저 자리 잡은 헤나 위로 초록도 그대로 엎어진다.고개를 돌리자 기다시피 걸어온 길이 보인다. 헤나의 발이 만들어낸 얕은 고랑 두 개는 끝도 없이 늘어진다. 사람들이 여길 밭으로 착각하고 씨를 뿌리면 어쩌지. 초록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옆으로 몸을 굴린다. 헤나의 몸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헤나의 딱딱한 몸보단 바닥이 덜
응모작 중 인상깊게 읽은 작품은 , 였다. 은 납품용 김밥을 만드는 생산 공장 내 직원들의 이야기로, 그 안의 정치적 관계와 경쟁자의 내밀한 감정들을 다루고 있다. 일명 대졸자인 신입 지연을 향한 옥혜의 불안하고 못미더운 심정이 잘 드러나 있어 작품의 긴장감을 더해준다. 다만 지연과 옥혜의 대결 구도가 영어 능력과 대학 졸업장 같은 구시대적인 스펙으로 좁혀지는 것이 아쉬웠다. ‘새파랗게 어리다’고 표현되는 지연의 능수능란함,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옥혜의 야생적 생명력이 좀 더 드러났다
표현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몇 년 동안은 ‘참여의 의의’라는 표현과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였다. 동고동락하며 행위의 가치를 불어넣느라 친구로서 큰 빚을 졌다. 결실이라거나 성취와 같은 표현과는 도무지 가까워질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참여의 의의’와 가깝게 지내야 했다. 최근 몇 주만 해도, 착함과 정상을 겨우 구분하게 되었을 때 그 구분을 뒤엎는 비정상의 표상이 나타났다. 오랜 시간 준비했던 시험에선 떨어졌다. 여덟 번의 방문 끝에 커피 산미가 정확히 취향의 가운데에 들어맞는다고 확신했던 카페는 아홉 번째 방문에서 원두를 바
기름집 앞은 한산했다. 영선과 같이 왔을 때보다 황량한 분위기가 더 강해진 것 같다고, 연수가 거리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연수는 그때 영선의 손에 들려있던 빨간색 천 가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기름집을 가장 먼저 들르고, 이후엔 고작 다섯 발자국 거리의 채소가게에서 무 두 개를 더 샀을 뿐, 이외에 더 구매한 것은 없었다. 무의 크기를 과하리만큼 크게 가늠하더라도, 장바구니의 절반에도 못 찰 내용물이었다. 그런데도 연수의 기억 속 영선은 집을 나서기 전, 모처럼의 시장 나들이라고 말하며, 그 가방을 손에 꼭 쥐었다.“짠 지
신문에 글이 실리는 건 처음이네요. 누군가가 제 글을 읽을 거라고 생각하니 설렙니다. 당선됐다는 소식을 듣고 상금도 상장도 신문에 글이 실리는 것도 다 좋았지만 가장 좋은 건 제 글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단 거였습니다. 글에 대한 평을 받기는 쉽지 않고 이런 기회가 소중하단 걸 알아 너무 지금도 너무 기쁩니다. 저는 동화같이 환상적인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처음엔 피 대신 머스타드가 흐르는 남자의 이야기를 쓰려 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전혀 환상적이지 않은 글을 쓰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칸쵸를 먹다가 막연히 이런 얘기
후문에서 아침 선도를 설 때면, 고개만 들어도 시야에 잡히는 미용실을 난 시간이 날 때마다 힐끔거렸다. 그렇게 쳐다봐도 오늘따라 그 애가 일찍 오는 일은 없을 걸 알면서도 그랬다. 교칙으로 정해진 등교 시간이 가까워지면 갑자기 학생들이 몰렸다. 손뼘으로 귀밑머리 길이나 무릎 위 치마 길이를 정신없이 재다 보면 어느 순간 이상하게 소란이 사그러졌다는 걸 느끼는데, 그럴 때면 꼭 내 앞에 그 애가 서 있었다. 그 애는 모든 선도부원들이 꺼려 했으므로, 당연하게 내가 맡는 것이 이젠 규칙처럼 박혀 있었다. 손. 그 앤 자못 착하게 손등을
응모작 중에서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은 「비극의 에필로그」와 「시선 ??이었다. 「비극의 에필로그」 는 기숙 수험학원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막연한 경쟁의 조바심 속에서 살아가던 ‘나’가 익명의 남자아이와 쪽지를 주고받으면서 공감과 소통을 이루고 변화를 겪는 일련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풋풋한 내용의 쪽지로 전달되는 연애 사건이 일단 재미있고, 그에 얽힌 과거의 사연도 설득력 있다. 안정된 문장과 깊이 있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심사자의 수업에서 한 차례 노출이 되었던 작품으로 당선권에
은 “누구에게나 구원은 필요하다”는 문장에서 시작된 소설입니다. 아쉽게도 저 문장은 퇴고를 거듭하면서 사라졌습니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저와 재이, 우리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24살, 이제 학교에서 사회로 내동댕이쳐지는 지금 이 순간에만 쓸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요. 꼭 지금 당장 써야만 할 것 같아서 급하게 완성시켰습니다. 덕분에 마음에 드는 곳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더 많은 아쉬운 소설이 되어버렸어요.사실 원래 초고에서는 훨씬 밝고 환한, 청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러고 한참동안
나는 실직했다. 갑작스럽게 회사가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사원증을 반납하고도 한동안 빈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간신히 취직했다고 생각했더니 회사가 망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 이후 두 달 동안은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해 전전했다. 매일같이 새롭게 올라오는 공고를 보고 수십 개의 자기소개서를 썼다. 자신의 경험 중 실패한 경험을 쓰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무엇이었는지 쓰시오. 결과조차 보지 못한 지난 회사의 프로젝트를 적어 내려갔다. 이 실패 경험을 디딤돌 삼아 귀사에서……. 뒤에 이어붙일 말이
이번 심사에서 흥미롭게 읽은 작품은 , , 이었다.은 맨홀을 통해 의외의 시공간으로 이동한다는 판타지 설정의 소설이다. 맨홀이라는 무중력의 공간, 가난하고 자유로운 젊은 여행자, 그리고 그 여행을 통해 만나는 낯설고 따뜻한 관계가 눈길을 끌었다. 상실을 다루면서도 온기를 잃지 않는 이야기가 좋았다. 다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 - 그것이 주인공의 과거와 미래를 어떤 식으로 연결 짓는지를 보다 선명히 보여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돌연 열렸다 닫혀버린 맨홀처럼, 작품의 마
저는 소설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공대생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공대생이 소설을 쓰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잖아. 네 맞습니다. 공대생이 소설을 쓴다고 해서 대단하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공대생이 소설을 쓴다는 것이 조금 특이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제가 본격적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쓰게 된 계기는 작년 2학기에 문화콘텐츠 학과 한소진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였습니다. 그 강의를 듣고 소설을 쓰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저는 본격적으로 제 진로에 대해 가족 혹은 지인들의 상
아침, 내가 양치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서재에서였다. 나는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서재의 문이 잠겨 있었다. 나는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것으로 손잡이를 내리쳤다. 계속 내리쳤다. 그러자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문을 열었다. 바닥은 젖어있었다. 피였다. 시체가 있었다. 집주인이었다.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화약 냄새가 났다. 피가 바닥을 적셨다.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사이렌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의 숨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으로, 한글의 웅혼한 숨결을 기억하는 해의 건대신문 문화상 소설부분 응모작은 20편이었다. 예부터 문학은 시대를 조명하고 비평하며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학은 시대정신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고 문학에게 인생의 해답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생에 대한 강한 질문을 던지고 성찰을 요구했다.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대체로 문화예술과 스포츠인데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대체로 문화예술이라고 한다. 문인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기에 고장 나기 쉬운 인생을 치유하는 존재인지도 모
영원은 글라스를 닦다 말고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담배 자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흐릿하게 퍼지는 담배 연기가 좋아 아직도 끊지 못했다. 여자가 뭔 담배냐는 핀잔도, 멘솔이 무슨 담배냐는 놀림도 영원은 굴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게 문을 닫아버릴까 생각하다가 바깥에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곱게 마음을 접었다.애플 마티니 하나랑 아디오스 하나요.밀려오는 주문에 잔을 내려놓고 셰이커를 집어 들었다. 더더욱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지만, 나갈 시간은 손톱 끝만큼도 없었다. 우현이 도와주고 있는 데도 바빴다. 정신이 빠져나갈
소설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까닭은 세상사 어떤 것이든 문화적 상상력으로 소설화할 수 있는 이야기 꾼이기 때문이다. 흔히 누명 쓴 사람들이 하소연할 때 ‘소설같은 얘기 그만하라’고 하는데, 그건 소설의 본질을 모르는 우매한 발언이다.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문학적 상상력과 문학의 틀로 엮어낸 것이 소설이기에 거짓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다.이번 건대신문 문학상 소설부문 14편을 펼쳐놓고 문학의 시대가 기우는 게 아니라 더 넓은 길로 나아가는 숙련기라는 생각을 했다.내가 제2회 건대신문 문화상 소설 부분에 당선